재임이 떠난 뒤 도형은 아내의 창백한 얼굴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오네. 언제까지 비가 온다고 해요?
혹시 일기예보 들었어?”
간병인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병실로 들어오면서 도형에게 물었다.
“아, 비가와요?”
간병인은 멍하게 표정 없이 대답하는 도형의 얼굴을 보며 놀라서 물었다.
“아니 이 선생 어디 아파? 표정이 몹시 안 좋은데?”
“아니에요. 아주머니는 혹시 외계인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외계인? 애들처럼….” 간병인은 도형의 말을 무시했다.
간병인은 비닐봉지에서 아이스크림콘 하나를 도형에게 건네주었다.
“외국에는 외계인을 믿는 종교 같은 것도 있대요.”
도형의 아직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생기 없는 말투로 말했다.
“왜 갑자기 외계인 얘기야? 무슨 외계인 영화라도 봤어? 그건 그렇고 우리 교수님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나 봐.
간호사들끼리 얘기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는데 오래 못 갈 것 같다네.”
“그래요?”
도형은 이제야 자신이 충격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재임이 이 여교수와도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도형은 생각했다.
“아주머니.”
도형은 누워있는 여교수의 팔다리를 마사지하고 있는 간병인을 불렀다.
“왜?”
도형은 자신이 겪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졌다.
“오늘 아주머니 안 계실 때, 여기 누가 왔었는데요.”
도형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누구? 누가 문병 왔다 갔어?”
“네. 그냥 얼마 전에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인데요.
옆 건물 옥상에서 자살하려고 뛰어내리려는 것을 제가 우연히 발견해서 뛰어내리지 못 하게 했거든요.”
“저런, 그래서?”
간병인은 놀라면서 물었다.
“옆 건물 고시원에서 사는 청년인데요. 정신적으로 약간 문제가 있어 보였어요.”
“아, 우울증 그런 거? 요즘 우울증 걸린 사람들이 많다고 하던데. 그래서? 왜 죽으려고 했대?”
“잘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 청년이 병실에 와서 이 사람하고 텔레파시로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어요.”
“텔레파시?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도형은 재임의 이야기를 꺼낸 것을 후회했다.
“그냥 마치 무당처럼 어떤 능력이 있나 봐요.”
“그래서?”
간병인은 궁금하다는 듯이 도형이 앉아있던 보조 침대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 사람이 이 사람하고 대화를 나누었데요. 이 사람이 내가 해 주는 김치볶음밥을 먹고 싶다고 했데요.
그리고 빨리 깨어나서 나와 뉴질랜드에 가고 싶다고도 했다고 하고요.
이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김치볶음밥이거든요. 그리고 뉴질랜드 가려고 적금을 들었는데 이번 달이 적금 만기 일이에요.
이 사람 말을 믿어야 할까요?”
간병인은 너무 놀랐다는 듯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도형을 쳐다보았다.
“에이, 그럴 리가. 누군가에게 무슨 소리를 듣고 와서 선생님에게 사기 치는 걸 거야.
세상에 사기꾼들이 얼마나 많은데. 조심해요. 그 사람 무서운 사람이네.”
“그렇겠죠?”
“그럼, 선생님은 애들하고만 생활해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구먼. 이 세상에 얼마나 나쁜 사람들이 많은데.
하긴 돈 때문에 사람도 죽이는 판에 못 할 일도 없겠지. 사기 치는 거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아주머니도 사기를 당해 보셨어요?”
“당연하지, 사기 안 당하고 사는 사람이 있나? 아마 없을걸. 큰 사기냐, 작은 사기냐 차이지. 그래서 그 사기꾼한테는 얼마나 빼앗겼나?”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그냥 혼자 어렵게 살고 있는, 착하고 여린 청년이에요.”
“아 그래? 하여간 그런 사람 조심해야 해. 그 사람 다시 오면 나도 좀 만나게 해줘 봐. 내가 얼굴 좀 봐야겠으니. 난 얼굴 보면 대충 어떤 사람인지 알거든.”
“사기꾼은 아니에요. 그리고 지금 기억상실증에 걸린 상태예요. 과거의 기억이 다 사라져 버렸는데 지금 조금씩 생각이 나고 있다고 하네요.”
“진짜?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불쌍한 사람이네. 젊은 사람이 어쩌다가?”
“사연이 좀 길어요. 나중에 더 자세히 얘기해 드릴게요.”
간병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누워있는 여교수에게로 갔다. 칸막이 커튼을 치고 물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닦을 준비를 했다.
도형은 며칠 동안 재임을 찾아갈 수 없었다. 그가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을 시간이 갈수록 더 믿을 수 없어졌다.
“그건 우연이다.”
며칠 동안 수백 번 혼자 한 말이다.
도형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 아내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도형은 재임에게 전화를 했다. 도형에게 다시 한번 병실로 와 달라고 부탁했다.
한 시간쯤 지난 후에 병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형은 그가 왔음을 직감했다.
도형을 지체하지 않고 병실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재임이 오늘은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재임은 전보다 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 와.”
도형은 애써 밝은 표정으로 재임을 맞이하려 했다.
재임은 가려진 커튼 사이로 도형의 부인 옆에 누워있는 여교수를 보았다.
“여기 다른 분도 계시네요?”
“그분도 의식이 없는 상태야. 이분 간병인이 계시는데 네가 지난번에 와서 내 아내와 대화했다고 얘기했더니 사기꾼이니 조심하라고 하더라고.”
“네?”
재임은 재미있다는 듯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도형은 재임이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재임은 언제나 가벼운 미소만 보여 줄 뿐이었다.
“그럴만하죠. 상관없어요. 사실은 저도 많이 놀랐어요. 부인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그냥 혹시나 하고 했는데 사실 저도 정말 놀랐어요.”
“알고 있겠지만 난 아직도 너를 믿을 수 없어. 네가 빨리 치료받고 상담받고 해서 정상적으로 생활하기를 바랄 뿐이야.”
“그러면 좋겠죠. 하지만 지금은 제가 먼 우주에서 온 외계인이라는 확신이 점점 강하게 들어요. 아주 많은 기억이 떠올랐어요.
제가 태어나고 자라고 지구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요. 거의 모든 것들이 생각이 났어요.”
“아 정말?”
재임은 오랫동안 자신의 과거 기억을 도형에게 자세하게 말했고 도형은 진지하게 그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다.
“놀라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난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
“이해해요.”
도형은 머뭇거리며 얘기했다.
“오늘도 아내와 얘기를 한번 시도해 줄 수 있을까? 오늘도 만약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너의 능력을 믿을 수 있을 거야.”
“오늘 그러면 다시 해 볼게요. 오늘은 꼭 믿게 되실 거예요.”
재임은 부인의 옆에 앉아도 되는지 눈빛으로 도형에게 물었다.
도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임은 의자에 앉아 누워있는 도형 아내의 팔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오늘은 그날처럼 재임의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10분 이상 지나도 재임은 같은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거의 30분이 다 돼서야 재임이 눈을 떴다.
“오늘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재임의 이마에 땀이 맺혀있었다. 몹시 아쉬워하는 목소리였다.
“괜찮아. 들리는 게 이상한 거지. 힘들었나 보네. 땀을 많이 흘렸어. 휴게실에 가서 시원한 음료수라도 한잔하자. 이젠 이런 일 하지 말고.”
“아니 내일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제발 딱 한 번만이요.”
“마음대로 해봐. 네가 포기하고 싶을 때까지.
아내가 깨어나기 전까지는 아무 때나 상관없어. 매일 와도 되니까 죽지만 말아. 옥상에서 뛰어내리지만 말라고.”
“부인의 소리를 다시 들을 때까지는 죽지 않을게요.”
두 사람은 서로 미소를 짓는 것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간병인이 들어오며 도형에게 ‘이 사람이 그 사기꾼이야?’라는 뜻의 눈빛을 보냈다.
도형은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잘생기셨네. 얘기 들었습니다. 우리 교수님하고도 얘기 좀 해 주시지요.”
간병인은 약간 비꼬는 말투로 재임에게 말했다.
“지금 가실 거예요. 이 사람 잠깐만 봐주세요.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도형은 재임의 팔을 잡고 급하게 병실을 나왔다.
“우리 공원에 가서 바람이나 쏘이자”
“네 상관없어요”
편의점에서 캔 커피 두 병을 사서 병원 앞 작은 공원 벤치에 두 사람이 앉았다.
도형이 조심스럽게 먼저 말을 꺼냈다.
“왜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생각할까?”
재임이 대답하기 전에 도형은 말을 이었다.
“원인이 무엇일지 많이 생각해 봤어. 뭔가 큰일을 당했을 거야.
그 일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혼자 감당하기가 어려워서 자신이 지구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우리의 뇌는 너무 견디기 힘든 기억이 있으면 그 기억을 없애고 다른 기억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고 얘길 들은 거 같아.
분명 너는 외계인이 아니고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증명해 줄게.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그날 죽으려고 옥상에 올라가길 잘한 것 같네요. 선생님이 저를 보고, 또 찾아와 주시고 날 도와주신다고 하니 좀 위로가 되네요.
하지만 저도 노력할 거예요. 지금은 내가 진짜 지구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어요.
나도 증명하고 싶어요. 내가 지구인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는 다시 원점이군”
도형이 재임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재임은 도형의 손에서 따뜻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좋아. 그럼, 게임을 시작해 봅시다. 너의 어릴 때 얘기 좀 더 해봐. 지구에 오기 전에 일을. 내가 들어보고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이야기인지 좀 판단해 봐야겠어.”
도형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제가 살던 곳도 지구만큼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지구처럼 식물이나 동물의 종류가 많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운 식물과 동물들이 많이 살고 있었어요.”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어?”
도형은 마치 공상 과학 영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처럼 물었다.
“지구인들보다 조금 더 키가 컸어요. 몸은 더 가늘고요, 피부색은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완전 흰색이고요, 머리털은 없어요.”
“과학은 얼마나 발달하였는데? 만약 지구까지 우주선을 타고 왔다면 과학기술이 엄청나게 발달했겠네?”
“글쎄요, 정확히는 말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지구보다는 훨씬 발달했던 것 같아요.”
“그럼, 그 행성에서 배운 과학지식 하나 알려줘 봐. 외계에서 왔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고 어려운 첨단 과학 분야 하나 알려주면 좋지 않을까?
그러면 천재가 나왔다고 난리 날 텐데.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거야.”
돈 이야기를 꺼낸 것을 도형은 후회했다.
재임은 약간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의 자연법칙과 지구의 그것이 다른 것 같아요.
정말 신기한 일이지요. 평행우주라고 들어보셨지요? 수없이 많은 우주가 존재하는데 사실을 각각의 우주의 자연법칙은 일치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 우주들은 따로 존재하기도 하고 서로 겹쳐 있기도 하다고 배웠어요.”
“그건 또 뭔 소리야?”
“지금 선생님이 존재하는 우주와 내가 존재하는 우주가 다른 우주일지도 모른다는 거죠.
분명히 내가 살았던 행성은 아마 선생님이 사는 우주에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내가 지구 가까이에 오자 내가 타고 온 우주선은 해체되기 시작했어요. 마치 고철 덩어리처럼 작동하지 않았어요.
우리 행성의 과학으로 만든 우주선은 지구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거죠.
우리의 과학과 지구의 과학은 다르니까.
다시 얘기해서 지구에서 첨단 과학을 이용하여 만든 어떤 장치를 우리 행성에 가져가면 작동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 둘을 서로 다른 우주에 존재한다는 건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각각의 우주를 구분할 방법이 없어요. 마치 배경이 같은 여러 영사기의 영상을 겹쳐서 비추는 영화와도 같은 거죠.”
“사실 지구는 우리 행성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 행성이었어요.”
“지구로 따지면 마치 화성과 비슷한 존재?”
“네가 온 행성이 어딘데?”
“지구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어요. 지구에서는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럼 두 행성은 서로 다른 우주에 존재한다고?”
“그럴 수도 있죠.”
“한 우주에서는 다른 우주의 행성이 보이고, 또 다른 우주에서는 다른 우주의 어떤 것들이 안 보일 수 있고?”
“그렇죠.”
“무슨 이야긴지 전혀 모르겠군. 하여간 네가 살았던 행성의 자연법칙과 지구의 자연법칙이 다를 수 있다는 거잖아?”
“제가 보기에는 그 법칙은 그곳에 사는 생명체가 만들어 내는 것 같아요.”
“그 건 또 무슨 얘기야?”
“음 예를 들면 지구에 어떤 자연현상을 어떤 위대한 과학자가 모순 없이 설명하면 그게 자연법칙이 되죠. 하지만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거나 모순이 생기면 그건 법칙이 될 수 없어요.”
도형은 이제 도저히 그 말을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알았어. 너무 어렵네. 그럼, 그곳 사람들 얘기 좀 해봐. 그곳 사람들도 지구인들처럼 비슷하게 살아가? 거기 사람들도 죄를 짓고, 감옥에 가기도 해?”
“우리 행성은 두 개의 대륙으로 나누어져 있어요.
마른 땅과 젖은 땅으로 나뉘죠.
지구처럼 대륙이 완전히 떨어져 있지 않고 마치 모래시계처럼 가운데 좁은 길로 연결되어 있어요.
왼쪽 대륙은 대부분 사막과 산악지형으로 사람들이 살기 불편한 곳이라 이곳을 마른 땅이라고 하고 오른쪽 대륙은 평지가 많고 날씨가 좋아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이죠.
이곳을 우리는 젖은 땅이라고 불러요.
아주 오래전에는 마른 땅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았는데 젖은 땅에서 사람들이 죄를 짓거나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강제로 마른 땅에 보내기 시작했어요.
젖은 땅의 사람들은 규칙이나 법을 만들지 않았어요.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갔죠.
그러다 다른 사람들에게 큰 해가 되거나, 이치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한 사람들은 모두 마른 땅으로 보내버렸죠.
젖은 땅의 유일한 규칙인 셈이죠.
그래서 내가 떠나오기 전까지 두 땅의 인구는 거의 비슷해졌었어요.
하지만 스스로 마른 땅으로 떠나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젖은 땅에서의 생활이 지겨워진 사람은 마른 땅을 동경하면서 떠나는 거예요.
하지만 일단 마른 땅으로 넘어간 사람은 절대 젖은 땅으로 다시 넘어올 수는 없어요. 젖은 땅의 사람들은 수천 년을 이어오는 동안 점점 더 온순하고 선해졌어요.
그들은 서로 돕고 평화롭게 살아갔죠. 모두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거죠. 젖은 땅의 사람들이 갑자기 자살하기 시작했어요.
우리 행성의 사람들은 절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았거든요. 아무리 힘든 일을 당해도 자살을 하지는 않았죠.
아니 자살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기는 했어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다 갑자기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시작한 거예요. 마치 자살 바이러스가 퍼진 것처럼이요.
처음에는 하루에 수십 명씩, 그러다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으로 늘어나다가 결국 젖은 땅 전체인구의 반 이상이 죽어버렸어요.
거리에는 시체들로 넘쳐났고 젖은 땅의 지도자들은 결국 행성을 폭발시켜 버리기로 결정을 내린 거죠.”
“그렇다고 행성 전체를 폭발시켜 버린다고? 사람들이 자살을 택한 이유가 뭔데?”
“나도 자세하게는 모르겠는데 그냥 권태를 느낀 것 같아요. 삶의 권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삶을 고통스럽게 느낀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집단 정신병 같아 보였어요.”
“그럼 마른 땅에 살던 사람은 어떡하고?”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한 거죠. 젖은 땅의 지도자들은 죽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다른 행성으로 가서 살 수 있도록 거대한 우주선들을 제공했어요.
수만 명의 사람이 우주선으로 다른 행성으로 도망쳤지만 모두 실패한 것 같아요. 저도 그중에 한 사람이고요.”
“아 너는 어떻게 성공한 거야?”
“그걸 모르겠어요. 하여간 나는 지구에 도착했고 지구인의 몸을 가지게 되었어요.”
“어떻게 지구인의 몸을?”
“복제요. 지구인의 몸을 복제하여 우리의 뇌를 이식한 것 같아요.”
그 이야기에 도형은 소리 내어 웃었다.
“미안해. 너무 만화 같은 이야기라. 믿기가 어렵다.”
“알아요. 나 자신도 믿기 어려워요. 그냥 나의 뇌 속에 저장되어있는 기억이 그렇다는 거죠. 나도 정상이 아닌 것은 확실한 것 같아요.”
재임도 도형과 같은 목소리로 크게 웃었다.
“또 말도 안 되는 외계인 이야기는 다음에 또 듣기로 하지. 그나저나 우리 옆 침대 환자가 위독한 상태라고 하네”
“아 그래요? 제가 얼핏 보기에 그분은 나이가 좀 들어 보이던데요?”
“60이 조금 넘으셨데. 어느 대학에서 심리학과 교수를 지내셨다고 하는데 강의 도중에 갑자기 쓰러지셨다네.”
“그분하고도 대화를 좀 시도해 볼까요?”
“에이, 이제는 그만하지?”
도형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분 가족들에게 한번 이야기해 볼 수 있을까요?”
“그분 가족이 없어. 조카 하나 있는데 지금 미국에 있다네. 가족이 있다 해도 허락하지 않을 거야.”
“그럼 한 번 아무도 없을 때 시도해 볼까요?”
도형은 또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글쎄. 기회가 되면 한번 해보지 뭐.”
“재임아, 아직도 난 네가 갑자기 죽어버릴까 봐 좀 불안해. 사실 아침마다 생각해. 아직 살아있겠지? 죽은 건 아니겠지 하면서.”
“사실 죽을 결심을 크게 하고 옥상에 올라간 것은 아니에요. 그냥 나도 모르게 옥상 난간으로 무언가가 나를 이끌고 갔어요.
외로움일 수도 있고, 그리움일 수도 있고, 그냥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고 간 느낌이에요.
그래서 잘 모르겠어요. 죽음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우리가 자살이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은 지독한 병에 의한 죽음이잖아요. 갑자기 암이 온몸에 번져서 죽는 사람처럼 사람을 자살하게 만드는 지독하고 잔인한 병.”
“그래서 또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네?”
“아니요,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 하나를 찾았어요. 바로 선생님에게 내가 외계인이라는 것을 믿게 만들 때까지는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에요.”
“그러면 내가 빨리 믿어버리면 안 되겠네.”
“그럴 수도 있네요. 하지만 시간이 걸리겠죠. 믿을 수 없는 얘기니까요.”
“선생님 소설을 어떤 내용이에요?”
“갑자기 내 소설 얘기?”
“외계인 이야기는 너무 현실성 없잖아요. 현실적인 얘기 좀 해보죠?”
“그러고 보니 내 소설도 현실성 없긴 마찬가지네.”
“어떤 이야기인데요?”
“현대 문명이 발견하지 못한 아마존 원시 부족 이야기.”
재임은 작은 소리로 킥킥거렸다.
“진짜 외계인 이야기와 비슷하네요.
빨리 읽어보고 싶네요. 언제쯤 완성돼요?”
“아직 멀었어. 아내가 깨어나기 전에 마치려고 하는데 잘 안 풀리고 있어. 요즘에는 거의 한 글자도 못 쓰고 있지.”
“빨리 읽어보고 싶어요.”
“노력해 볼게. 하지만 실망할지도 몰라.”
“아니요.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인데요.”
“고마워.”
“병실에 가보셔야죠?”
“그래 가자.”
Epilogue
난 그녀와 함께 우주선에 올랐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우리가 지구에 도착할 때쯤 우주선에 이상이 생겼다.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우주선이 흔들렸다.
난 그녀의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다음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지구에서 눈을 떴다.
그녀는 어떻게 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