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던 시대

by 정돈서재

이 이야기의 시작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1986년 어느 봄날... 한 여성, 나의 엄마는 출근을 하다가 나를 급하게 낳았다고 한다. 심지어 택시를 잡으러 갔는데, 뒷사람이 손을 들고 소리를 치며 새치기를 계속 시도했다고 한다. 그때 그 택시를 못 잡았다면 나는 지금 온전히 여기 있을까? 택시 기사님은 다행이도 서있는 사람들 중에서 유독 배가 볼록 나온 우리 엄마를 태웠고 무사히 병원까지 갈 수 있었다. 내가 둘째라 그런지 오래걸리지 않고 2시간만에 편하게 나왔다고 한다. 태어날 때 순조로웠 던 것이 내 인생에 유일한 효도라 여길 만큼... 그 이후의 삶은 얼마나 속을 썩힘의 연속이였다. 생일에 있어서 내가 약간 아쉬운 건, 1988년에 태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가 말을 할줄 알게 되자. 큰아빠, 고모, 삼촌, 이모 할 것 없이 내가 ‘아시안 게임’을 할 때 태어났다며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아시안 게임’ 이야기를 해줬다. 사람들이 ‘호돌이’니, ‘굴렁쇠 소년’이니 올림픽이 이야기를 하도 많이 해서 올림픽이 좀 더 있어보였는데, 사람들은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86년생들에게 ‘아시안 게임’이야기를 해줬다. 다행인건 삼촌, 이모와 갓난아기 시절 티비를 보는 사진이 종종 있는데, 분명히 ‘올림픽 경기’였을거라 자부한다. 기억은 전혀 못하지만 그 위대한 시대에 내가 있었다는게 자랑스럽다. 올림픽을 치룬 만큼 그당시 대한민국은 성장의 씨앗을 품었었다. 이후에 들어보니 그전에 오일쇼크도 있었지만, 적어도 우리 가정에 그 어려운 파도를 맞이한 사람은 없어보였다. 내가 태어나고 1년이 지나 주식시장에 Black monday가 불어닥쳤지만, 사진속 표정을 보면 그 어느 누구도 주식엔 손을 안댄 것 처럼 밝았다. 아니면 서울살이를 하기엔 돈이 부족해서 가족 누구도 투자는 꿈도 못꾸던 시기였던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시기가 굉장히 희망찼다는 것이다. 드라마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지금과는 다르게 '꿈', '희망', '도전', '열정적인 사랑'과 같은게 주제였던 것 같다. 소재도 다양했다. '농구 스타'가 되는 드라마도 있었고, 최고의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위해 혹독한 훈련을 견뎌내는 드라마도 있었다. 요즘 비현실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나, 판타지를 찍어내는 건 미래 성취에 대한 희망의 기대가 부족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든다. 그리고 어린 시절 그 시대를 공유한 나는 미래에 대한 다양한 상상을 하며 자랐다.



우리 부모님은 내 상상을 뒷받침 하는 것을 넘어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셨다. 내가 말했던 1986년 이후 희망의 시대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도전을 했고, 우리 아빠는 큰 세상을 봐야한다는 일념으로 해외 여행을 계획했다. 초등학교 1학년때는 일본 여행을, 2학년 때는 미국을, 3학년 때는 태국여행을 시켜줬다. 지금은 저가항공사도 있지만, 그당시 비행기 값을 생각하면 해외 여행에 엄청난 지출을 하신 것이다. 나 스스로도 우리집이 꽤 산다는 걸 다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학원에도 꽤 많은 돈을 썼던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미국 여행중, 내가 한글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걸 아시고는 그뒤로 줄줄이 학원행이였다. 기억하기로는 10개정도의 학원을 다녔던 적도 있지만, 내가 버티지 못해서 나중엔 대폭 줄이고 그냥 놀게 됐다.



부모가 어떻게 했길래 한글을 모를까?! 하실 수 있지만. 부모님 둘다 열심히 일하시느라 나는 어린시절 할머니와 함께 있거나 혼자 있었다. 할머니께서 경로당(현 시니어 클럽)에서 고스톱을 치시다가 싸우시는 모습을 보면 나는 그냥 놀이터에 가서 놀거나 아파트 구석을 돌며 이것저것 떨어진걸 주우러 다녔다. 그시절 길바닥은 내게 보물창고 같은 곳이였다. 내가 할머니를 따라 경로당에 출근하지 않으면 혼자 집에 있던 날도 많았다. 맞벌이를 하느라 어쩔 수 없이 나를 방치해 뒀지만, 나는 부모님의 성실함을 눈으로 보고 배우며 컸다. 아빠는 회사원, 엄마는 선생님으로 중산층의 전형처럼 보이는 가족이였는데, 아빠는 겨울 아침이면 추위를 대비해 밖에 나가 미리 차에 시동을 켜놓으시고 돌아와서 식사를 함께 하시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내가 자고 있을 때, 출근 했으니 참 이른 출근이였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일찍 일어나는 다양한 활동을 했다. 이른 아침 식사하기, 이른 아침 여행 떠나기, 이른 아침 함께 신문보기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나와 세살 터울인 형과 내가 조금 더 자라니, 아빠는 산책을 알려줬다. 밤만 되면 우린 산책을 떠났다. 아파트를 돌기도 했지만, 주로 문구점에 가서 작은 장난감을 사는 것이 우리 일이였다. 그래서 난 산책이 참 좋았다. 산책을 하면 나는 “왜 저 달은 우리가 움직여도 저 자리에 있어?” 와 같은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아마 형은 그런 내가 바보같다고 생각했겠지만 다행이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산책 시간엔 내가 알아듣지 못할, 사회, 정치, 역사와 같은 이야기를 아빠와 형이 나눴다. 아니 정확히는 아빠가 형한테 알려주고 있었다. 아빠의 이야기는 언제나 재밌었다.(그렇게 배운 산책은 지금도 내게 가장 가까운 친구다.) 산책을 통해서 배운것이 또 있는데, 처세에 대한 질문들이다. ”우리가 여행을 갔을 때, 아빠 엄마를 놓치면 어떻게 해야하지?“와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받았다. 그리고 아빠는 이런식 질문도 자주 했다. “만약 너희 반에 물건이 없어졌어. 누군지 정확히는 모르지. 그런데 한 친구가 의심은 돼. 그러면 어떻게 할거니?” 이런 일은 실재로 우리 반에서도 일어났던 일이고, 때때로마다 상황이 조금 달랐다. 선생님의 지시로 책상위에 올라가 눈을 감은 우리는 때론 손을 들기도 하고, 범인으로 지목된 누군가가 불려 갔지만 그친구가 범인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 아빠의 질문에 나는 한참을 생각했지만, 뭐라 답한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후로는 묻는말에 대해 섣불리 ‘뭐라도’ 대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물어봐도 “모른다”고 답할 수 있음을 배웠다.



위에서 말한 것 처럼 난 시작부터 공부를 잘 못했다. 엄마가 학교 선생님인데도 불구하고, 엄마한테 붙잡혀서 배운 건 죄다 알아듣기 어려웠다. 엄마는 한글이 느렸던 나를 앉혀놓고 퇴근 후에 회초리와 함께 한글 특별 교육을 실시했다. 분명히 전문가 일텐데, 난 그렇게까지 무서우면서도 학습 효과가 떨어지는걸 처음 경험했다. 어제까지 다정하던 엄마가 퇴근 후 돌변하게 된 것도 모두 내 공부 탓인 것 같았다. 아마도 가르침 보다는 내 아들이 공부를 잘 못한다는 것에 대한 분풀이였을 수도 있다. 특이한 건 엄마는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가 필요하신 분이였지만, 아빠는 때가 되면 본인 처럼 공부를 할 것이라 편안하게 생각하시는 편이였다. 지혜로우신 부모님께서는 논의 끝에 동네 학원에 나를 맡기기로 하고 다양한 학원에 면담을 다녔다. 사실 바쁘신 관계로 학원에 대한 정보를 알았다기 보다는 가까운 학원에 그냥 나를 맡겼다. 학원을 다니면서 책임은 모두 학원 선생님께로 가고 잠시 평화가 찾아왔지만, 때때로 엄마는 나가려는 나를 붙잡고 "책 10쪽만 읽으면, 나가서 놀 수 있어." 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고, 나와 내 사촌동생과의 책읽기 대결을 펼치기도 했지만 모두 나를 동기부여시키지 못했다. 책과 친구를 포기한 채 울기도 했고, 명석하던 사촌동생과의 비교는 나를 점점 더 체념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될 즈음 부모님은 나의 공부에 대해 많은 부분 놓게 됐고, 4학년 차이의 형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더 큰 관심을 형에게 쏟기 시작했다.



공부에 있어서 부모님의 의견이 완전히 갈렸지만, 돈 씀씀이에 있어서는 어떻게 이렇게 부부가 같은 생각을 가졌는지 모르겠다. 우선 가족이 놀이공원이든, 수영장이든, 스키장을 가더라도 그곳에서 파는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어딜 가든 이미 싸온 음식을 먹을 뿐이였다. 장난감이든, 자전거든, 롤러브레이드든 항상 제일 좋은 제품에서 몇 단계 내려가서 최소한의 기능만 있는 제품을 사주셨다. 나는 초등학교 후반까지 다양한 사람들에게 물려받은 옷만 입었는데 이점이 크게 불만은 아녔다. 친형이 입던 옷이라면 내가 물려 받고 싶었던 것도 있고, 키가 너무 빨리 커버려서(초6에 키가 167센티미터였다) 내 옷을 사도 금방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셨던 것같다. 나와 형 역시 어렸을 때부터 이런 점이 몸에 베어있어 절약에 있어서는 엄청난 능력을 보유하게 됐고, 꼭 비싼 물건을 보유하지 않아도 기능이 비슷하다면 지금도 큰 불만은 없다. 어머니는 지금도 물티슈를 재활용해 쓰시고, 형도 아기 옷에 큰 돈을 쓰지 않는다. 나는 아파트에 버려진 물건을 다시 집으로 들여오기도 하고, 친구에게 당근을 예찬하며, 내 소품들을 중고물품들로 채워가고 있으니 우리 가족은 그런 정신을 지금도 잘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습관이 나중에 어떤 도움이 될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우리 가족만의 세계는 그자체로 견고했으나, 나는 '송파 친구들'과 어울리며 세계관의 확장과 서로 다른 세계의 충돌을 겪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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