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왕국, 바이칼호를 달리다

러시아 여행에세이 <그 겨울 러시아>

by 유림


보드카 기운인지 여독인지 바이칼에 대한 설렘 때문인지 새벽 일찍 잠에서 깼다. 몸도 기분도 상쾌했다. 두차와 키사와 인사를 나눈 후 나탈리아가 정성스레 차려준 아침에 또 한 번 감동하며 마음도 배도 부르게 식사를 마쳤다. 알혼섬 투어에 나서기 위해 어제 저녁 옆 테이블에서 식사를 나누던 친구들과 함께 버스를 탔다.


투어는 바이칼호수의 전경을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전망대에서부터 시작했다. 눈을 제외하고 안팎으로 꽁꽁 여매도 매서운 칼바람을 이길 순 없었다. 셔터를 누르기 위해 장갑을 잠시 벗을 때는 손가락이 아프다 못해 아렸다. 주인 잘못 만난 카메라도 안쓰러워 가슴에 품었다 꺼냈다를 반복했다.


20190131_102218.jpg 러시아 겨울 풍경 _ 얼어붙은 바이칼호
20190131_111057.jpg 러시아 겨울 풍경 _ 얼어붙은 바이칼호


버스는 이어 광활한 바이칼호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꽁공 얼어붙은 바이칼호 위로 여러 대의 버스가 질주하듯 달렸다. 몇 몇 포인트에 차를 세우고는 30분 간 자유시간을 준다. 얼어붙은 바이칼은 신기하다 못해 신비로웠다. 얼음왕국 그 자체였다.


관광객들은 빙하 위에서 뛰기도 하고 누워도 보며 경이로운 자연 앞에 감탄하고 환희했다. 기이한 형상의 얼음동굴과 그 속을 가득 채운 빙각들은 에머랄드빛 수정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버스를 세울 때마다 괜스레 어깨를 으쓱해보이는 기사를 보며 대동강물을 판 봉이 김선달이 떠오르기도 했다.



0K6A9722.JPG 러시아 겨울 풍경 _ 얼어붙은 바이칼호


관광하기에 좋은 날씨이긴 하나 눈이 오지 않은 것이 사뭇 아쉬웠다. 눈 내리는 바이칼호를 만났다면 얼음왕국이 아닌 겨울왕국의 실사판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자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아래서 올라오는 콧김과 입김이 서리가 되어 속눈썹 위에 소복이 쌓였다. 1그램도 안 되는 그 성애가 눈꺼풀을 내리려 하고 닦아내면 금세 또 생기고 여간 성가시지 않을 수 없다. 그 성애가 싫으면 마스크를 벗으면 될 것이고 추위가 싫으면 성애를 반복적으로 닦아내면 된다. 이 작은 부분에도 선택이 필요하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나는 결국 마스크를 벗어버렸다.


세스 고든의 ‘보랏빛 소가 온다’가 떠올랐다. 두 시간쯤 지나니 에메랄드 수정 같아 보이던 것들이 얼음덩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0K6A9660.JPG 러시아 겨울 풍경 _ 얼어붙은 바이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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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버스기사가 차를 세우고 준비해온 도시락을 나눠줬다. 배는 고팠지만 먹는 게 조심스러웠다. 6시간 투어에 생리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은 그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충 식사를 마무리하고 다음 포인트로 이동했다.

20190131_125837.jpg 러시아 겨울 풍경 _ 얼어붙은 바이칼호


몇 몇의 포인트를 거쳐 얼음왕국에 실증을 느낄 무렵, 마지막 포인트에 도착했다. 모든 관광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마지막에 숨겨두듯 바이칼의 대미를 장식하는 곳, 바이칼의 숨은 진주는 바로 이곳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바이칼 아래 흰 눈꽃이 가득 피어 잠들어있었다.


깊은 심해에 피어난 얼음꽃, 한겨울에 바이칼을 찾는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황홀경에 빠진 듯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정신없이 얼음꽃 구경에 나섰다. 사진을 찍으려고 장갑을 벗고서야 강렬한 추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이칼호수에 노을빛이 스며들 무렵 맨 마지막으로 버스에 올랐다.

0K6A9933.JPG 러시아 겨울 풍경 _ 얼어붙은 바이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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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돌아와 나탈리아의 따뜻한 누들스프로 허기를 달랜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은 왠지 엘사공주가 되어 얼음왕국 위를 나비처럼 춤추는 꿈을 꿀 것 같다.


0K6A9993.JPG 러시아 겨울 풍경 _ 얼어붙은 바이칼호





사진작가 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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