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행에세이 <그 겨울 러시아>
보드카 기운인지 여독인지 바이칼에 대한 설렘 때문인지 새벽 일찍 잠에서 깼다. 몸도 기분도 상쾌했다. 두차와 키사와 인사를 나눈 후 나탈리아가 정성스레 차려준 아침에 또 한 번 감동하며 마음도 배도 부르게 식사를 마쳤다. 알혼섬 투어에 나서기 위해 어제 저녁 옆 테이블에서 식사를 나누던 친구들과 함께 버스를 탔다.
투어는 바이칼호수의 전경을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전망대에서부터 시작했다. 눈을 제외하고 안팎으로 꽁꽁 여매도 매서운 칼바람을 이길 순 없었다. 셔터를 누르기 위해 장갑을 잠시 벗을 때는 손가락이 아프다 못해 아렸다. 주인 잘못 만난 카메라도 안쓰러워 가슴에 품었다 꺼냈다를 반복했다.
버스는 이어 광활한 바이칼호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꽁공 얼어붙은 바이칼호 위로 여러 대의 버스가 질주하듯 달렸다. 몇 몇 포인트에 차를 세우고는 30분 간 자유시간을 준다. 얼어붙은 바이칼은 신기하다 못해 신비로웠다. 얼음왕국 그 자체였다.
관광객들은 빙하 위에서 뛰기도 하고 누워도 보며 경이로운 자연 앞에 감탄하고 환희했다. 기이한 형상의 얼음동굴과 그 속을 가득 채운 빙각들은 에머랄드빛 수정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버스를 세울 때마다 괜스레 어깨를 으쓱해보이는 기사를 보며 대동강물을 판 봉이 김선달이 떠오르기도 했다.
관광하기에 좋은 날씨이긴 하나 눈이 오지 않은 것이 사뭇 아쉬웠다. 눈 내리는 바이칼호를 만났다면 얼음왕국이 아닌 겨울왕국의 실사판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자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아래서 올라오는 콧김과 입김이 서리가 되어 속눈썹 위에 소복이 쌓였다. 1그램도 안 되는 그 성애가 눈꺼풀을 내리려 하고 닦아내면 금세 또 생기고 여간 성가시지 않을 수 없다. 그 성애가 싫으면 마스크를 벗으면 될 것이고 추위가 싫으면 성애를 반복적으로 닦아내면 된다. 이 작은 부분에도 선택이 필요하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나는 결국 마스크를 벗어버렸다.
세스 고든의 ‘보랏빛 소가 온다’가 떠올랐다. 두 시간쯤 지나니 에메랄드 수정 같아 보이던 것들이 얼음덩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버스기사가 차를 세우고 준비해온 도시락을 나눠줬다. 배는 고팠지만 먹는 게 조심스러웠다. 6시간 투어에 생리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은 그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충 식사를 마무리하고 다음 포인트로 이동했다.
몇 몇의 포인트를 거쳐 얼음왕국에 실증을 느낄 무렵, 마지막 포인트에 도착했다. 모든 관광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마지막에 숨겨두듯 바이칼의 대미를 장식하는 곳, 바이칼의 숨은 진주는 바로 이곳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바이칼 아래 흰 눈꽃이 가득 피어 잠들어있었다.
깊은 심해에 피어난 얼음꽃, 한겨울에 바이칼을 찾는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황홀경에 빠진 듯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정신없이 얼음꽃 구경에 나섰다. 사진을 찍으려고 장갑을 벗고서야 강렬한 추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이칼호수에 노을빛이 스며들 무렵 맨 마지막으로 버스에 올랐다.
숙소에 돌아와 나탈리아의 따뜻한 누들스프로 허기를 달랜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은 왠지 엘사공주가 되어 얼음왕국 위를 나비처럼 춤추는 꿈을 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