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if
이것이 우울증의 시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몇 달 간, 아무것도 집중할 수 없었다.
늘상 보던 책은 고사하고 아무런 글도 읽을 수 없었고
웹툰도 예능도 드라마도 아무것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집중이 문제가 아니라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나에겐 깊은 죄책감만이 남을 뿐이었다.
삶의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내 죽음으로써 죄를 값아야 할 것 만 같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if. if. if"만 되풀이 되었다.
만약에 내가 그 날 집을 천천히 돌아봤더라면,
그래서, 만약에 내가 그 날 동생의 우울증 약을 먼저 발견했더라면,
그 이전에, 만약에 내가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었더라면,
더 이전에, 만약에 내가 이상한 낌새를 차린 그날 한마디 물어보았더라면,
아니 다시 그날, 내가 만나러가지 않았다면, 화를 내지 않았다면
과거 그 날의 시점을 기점으로 오며가며 '만약에'라는 늪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만약에 내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동생은 그날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 같아서
만약에 그날이 아니었으면, 어쩌다보면 잘 이겨내고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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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회사를 쉬면서 '금지옥엽' 이라는 드라마를 봤다.
드라마의 내용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남들에겐 가벼울수도 다소 황당할 수도 있는 엔딩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묵직한 깨달음을 주는 엔딩이었다.
"만약, 그날밤 복강안이 저에게 사랑했다 말했더라면, 그랬으면.."
소화, 이 세상에 만약은 없어요
그렇다.
만약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이라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며
지금 내가 이미 일어난 알고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겪고 있는 현실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그것에 대한 가정들을 상상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 것은 실제로 될 수도 없고,
만약 지금의 상태를 아는 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과거로 가더라도 모두가 비슷한 선택을 하고,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날은 이미 지나갔다.
내 잘못이라 해도, 내 잘못이 아니라해도
내가 되돌릴 수 없다.
만약이라는 것은 지금의 내가 과거를 보면서 상상하는 허구일 뿐이지
실존하지 않는 나를 괴롭히는 생각일 뿐이다.
나는 다시 되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결말을 모르는 상태에서 다시 되돌아간다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다.
만약이라는 것은
if 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더이상 만약이라는 늪에 빠지지 않기로 했다.
이미 지난 일이고, 나는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따금씩 떠오르며 괴로울때마다 생각한다.
'만약'이라는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