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
호중구 수치가 1000 밑으로 떨어지면 호중구 촉진제 주사인 ‘그라신’을 매일 맞는다. 일반 주사가 처음 바늘에 찔릴 때만 아프다면 이 호중구 촉진제 주사는 약물이 다 들어갈 때까지 바늘로 살을 찢는듯한 고통을 준다. 그래서 처음 맞았을 때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고 이에 다른 간호사 선생님들이 놀라서 내 병실로 왔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항암을 하며 호중구가 1000 미만으로 내려가 주사를 맞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부터 허리와 왼쪽 골반, 왼쪽 무릎의 고통이 시작됐다. 호중구 수치가 오를 때 몸살처럼 온몸이 아픈 사람도 있고, 나처럼 뼈가 아픈 사람도 있다고 한다. 저녁을 먹으려고 앉았지만 허리가 너무 아파 가만히 있지 못해 결국 진통제를 달라해서 타이레놀 두 알을 먹었다. 그러자 고통은 점점 가라앉아 병동 산책까지 마치고 잠에 들 수 있었다.
하지만 새벽 세시, 또다시 시작된 고통에 눈을 떴다. 엄마를 깨워 찜질팩을 데워달라고 했고, 따뜻한 찜질팩을 허리와 골반, 무릎에 올려두고 고통을 참아보려고 했다. 전에 소장출혈로 세 번째로 중환자실로 실려갔을 때, 의사 선생님이 고열 때문에 처방해 준 진통제로 인해 출혈이 났을 수도 있다고 한 이후로 진통제 먹는 게 두려워졌다. 그래서 최대한 약을 안 먹고 참아보려고 온찜질로 버텼지만 고통은 두 시간이 넘도록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간호사 선생님을 호출해 진통제를 먹고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다음 날, 병실로 원목실 수녀님이 기도를 해주시려고 찾아오셨다. 수녀님은 3차까지 하느라 너무 고생했다며 6차까지 다 마치고 치료가 종료되면 무얼 가장 하고 싶냐고 물으셨다. 순간 수많은 일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루종일 병실에 있으면 생각만 많아져 머리를
비우려고 티브이를 많이 보게 된다. 여행 프로그램을 주로 보는데 핀란드가 여러 프로그램에서 다뤄졌다. 가족들과 함께 ‘지구오락실’에 나온 헬싱키 피자집에 가서 피자를 먹고, ‘지구마불’에서 나온 산타마을에 가서 조카 다온이와 산타 할아버지를 만나게 해주고 싶다. 또 오로라를 보면서 잠들 수 있는 이글루 숙소에 누워서 오로라도 보고 싶고, 전에 내가 각색한 연극에 등장하는 ‘탐페레 공항’에도 가보고 싶다. 뿐만 아니라 친구들이랑 약속한 대만 ‘상견니 투어’, 홍콩 맛집 여행, 친구 보러 LA에도 가고 싶고, 강원도 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하동에도 가고 싶다. 여행이라면 많이 다녀서 미련이 없을 줄 알았는데 병동 산책도 겨우 하는 체력을 가지게 되고 보니 아직도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다는 걸 절실하게 느꼈다.
나는 수녀님에게 “너무 많아요”라고 대답을 했고, 수녀님은 그중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것 하나만 말해보라고 했다. 치료가 종료되고 다시 건강해지면 가장 하고 싶은 것... 그렇게 하나를 꼽아보니 그건 바로 산타마을도 오로라도 아닌 ’ 보통의 하루’를 사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글자 산책을 시키고, 글을 조금 쓰다가 점심을 먹고 넷플릭스를 보고, 또다시 글을 조금 더 쓰다가 저녁을 먹고 글자 산책을 또 나가고 잠에 드는 그런 보통의 하루. 예전의 내가 ‘무료하다’ ‘외롭다’라고 느꼈을 그 보통의 하루가 너무 간절하게 살고 싶었다.
그 보통의 하루를 다시 갖기 위해 치열하게 암과 맞서 싸우며 3차까지 왔다. 한 사이클마다 주사로 들어가는 스테로이드제를 제외하면 14번의 항암제를 맞는다. 크고 작은 부작용들로 몸과 마음이 약해지고, 시간은 엉금엉금 기어갔지만 그래도 결국엔 절반을 지나왔다. 남은 세 번의 항암도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떤 부작용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두렵지만 힘을 내어 받아보려고 한다. ‘보통의 하루’를 살며 무료함 대신 감사함을 느끼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