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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별 Feb 13. 2023

나의 워홀 실패해도 좋아

워홀 온 후 도진 폭식증

“캐나다 가면 여유와 낭만 있는 삶을 살 줄 알았는데..”


코워커 에이에게 했던 말이다.


퇴근 후 DQ라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있었던 때였다. 오늘 하루 뤱과 샌드위치를 몇 개 만들었는지 기억도 안 났다. 세상 꼬질한 상태로 에이에게 푸념했다.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오물오물거리던 에이는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낄낄낄
다들 그렇게 생각하죠.
웰컴투 헬~~


그나저나 6.25 전쟁 때도 있던 아이스크림 가게라는 에이의 소개답게 부드러운 아이스크림 맛이 일품이었다.






워홀 온 지 어느덧 85일째! 행복과 기쁨으로 가득 찬 생활을 했다면 좋으련만 방 한쪽 값이 달에 800불(80만 원)이 넘고, 월 교통비 10만 원이 넘는 밴쿠버에서 낭만과 여유 따위 집어치운 지 오래다.


다행히 새로 시작한 팀홀튼 일은 적응을 잘 했다. 가끔 매니저 리의 윽박에 화가 날 때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생활하고 있다. 어딜 가든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은 진리였다. 나이스하고 착한, 어리고 귀여운 코워커들과 영어로 대화하며 일하는 것은 상상 이상의 만족감을 주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한국에서 잘 극복했다고 생각한 폭식증이 재발했다. 주로 일을 가지 않는 쉬는 날에 미친 듯이 폭식하는 시간들이 늘었다. 처음엔 단순히 ‘도넛을 좋아할 뿐이야’, '캐나다엔 달콤한 음식이 많아'라고 생각했다면, 먹는 빈도와 강도가 늘어나고, 제대로 된 음미 없이 삼키는 행위 자체를 반복하는 나를 보며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자각했다. 급기야 혼자 있는 시간을 처내기 위해 최근엔 스시집에 지원했다.


오늘은 치킨버거 세트를 시켜서 먹고, 거기에 샌드위치 몇 개를 왕창 먹었다. 잼도 발라 먹고, 사과도 먹었다. 오전, 오후 동안 한 참 먹고, 이렇게 채워진 내 몸이 싫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하루의 반나절을 이렇게 보냈다면, 그날 하루는 이미 끝난 거다.


‘내가 왜 이럴까..’


한참을 누워있다 저녁이 될 때쯤 일어났다. 여전히 소화가 안 된 몸을 이끌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걸으면서 나는 내게 끊임없이 물었다. 뭐가 문제냐고.


풍경이 주는 위로


문제는 없었지만 생각은 많았다. 한국에 다시 귀국했을 때의 재취업의 여정, 일 년의 공백을 잘 매우고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 여기서 재미만을 쫓으며 시간을 보내는 게 맞는 걸까. 20대라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된 저축 없이 이래도 되는 걸까. 워홀의 개고생은 기본값이라 생각해서 그러려니 싶지만, 솔직히 이 개고생이 내 인생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봐, 그게 두려웠다.


그렇게 한 참 생각하다 결론을 내렸다.


‘이럴 거면 성공하고 싶지 않다’


조금 뜬금없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은 그런 결론이 나왔다. 이런 식으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과 완벽주의에 도리어 정성 없는 하루를 보내고, 내 선택의 여정을 즐기질 못할 거라면, 괜찮은 워홀을 보내지 못해도 된다. 이게 꼭 내 인생에 그럴싸한 도움이 되지 못해도 된다.


걸으면서 폭식증 관련 팟캐스트를 들었다. 진행자는 폭식증의 원인으로 ‘잘 살고 싶은 마음’을 꼽았다. 돌이켜보면 내 폭식증도 더 나아지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했다. 시간을 버리고, 낭비하면 안 될 것 같은 조급한 마음, 뭔가를 자꾸만 해내야 한다는 강박. 음식을 욱여넣는 형태로 존재를 증명하는 시간들.






워홀에 온 후 만난 언니가 있다. 한국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던 언니는 졸업 후 사람 만나는 걸 너무 좋아해 뜬금없이 스타벅스 카페에서 일을 했다고 말했다. 그 후 워홀에 왔고, 현재는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대학을 졸업 후 스타벅스에 취업했다는 것도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국 살 때 내게도 그런 하고 싶은 마음들이 있었다. 문득문득 지나가는 마음이었지만, 나는 이태원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외국인 사이에 껴서 일을 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도하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사무직 직장에 도움이 될 만한 경력을 쌓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 마음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캐나다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다. 팀홀튼은 워홀계의 원양어선이라는 별명도 있는 잡이다.


하지만 재미있다. 그러면 됐지 뭘 자꾸 증명하려고 하는 거냐!


그냥 오늘 밤은 한국어 자막 거하게 틀어놓고 미뤘던 일본 영화를 보련다. 그렇게 시간을 쓰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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