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2. 가치판단_나를 놓아줘

by 서하

4년의 간호대학 생활 중 스쳐지나가는 장면 중 하나.

“간호사는 환자를 판단하면 안 돼. 가치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말이야. 사람을 죽인 범죄자가 와도 그 사람이 최고 수준의 신체적 기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야.” 라고 강조하시던 학과장님의 모습.

그리고 대학교 1학년 동안 틈틈이 보았던 미국 의학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 1> 에피소드 중 하나는 여성을 성폭행하다 상해를 입어 수술을 받게 된 환자의 이야기였다.

그 에피소드를 보면서 성폭행범을 살리려고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성폭행범을 살리려고?’ 라고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분노의 감정이 앞서 ‘남의 인권을 파괴한 놈들은 죽어 마땅하지.’ 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내 상황이 될 줄은 그 땐 미처 몰랐다.

그로부터 5년 후, 나는 환자 한 명이 입원할 예정임을 알리는 전화를 받고 입원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환자는 다른 병원에서 전원을 오는 상황이었고 대략적인 환자의 의학적 상태에 관한 이야기는 인계를 받았다. 오래지 않아 환자는 침대에 누운 채로 병실에 들어왔고 나는 병실 안내를 하며 환자의 보호자들과 같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환자를 옮기려고 시트를 잡았는데 시트 사이로 삐져나온 환자의 발과 침상의 난간에 걸린 은색 수갑에 시선이 멎었다.


순간 ‘뭐지?’ 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어 보호자를 보았다. 서있던 보호자 셋은 본인들이 환자를 옮기겠다며 위험할 수 있으니 물러나라고 했다. 어안이 벙벙한 나를 보고 보호자 한 분이 물었다. “이야기 못 들었어요?”

나는 못 들었다고 대답했다. 보호자 셋은 알고 보니 환자의 친족 관계의 보호자가 아닌 환자가 수감되어있는 곳의 책임자들이었다. 이후에야 환자가 강력범죄를 저지른 수감자라는 것을 들었다. 타인의 생명권을 침해한 사람의 생명권을 최대한 존중해야 하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만 이것이 정말 맞는 일인가 하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기억했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기억의 편린이지만 나는 분명히 배웠으며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선서했다. 그 선서의 무게가 처음으로 느껴졌다. 최대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늘 하던 대로 했다.



2017년 대선을 앞둔 때였다. 첫 병원을 그만두고 그 다음으로 근무한 병원은 참전 유공자 분들을 위한 병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진보와 보수 정권에 대한 대립이 매우 극심했고 나는 라운딩을 돌 때마다 환자들로부터 진보당 후보를 뽑아서는 안 된다는 말을 귀에 피가 나도록 들었다.


그냥 “진보당 후보 뽑지 마라.” 라고 하는 건 차라리 다행이었다. 환자분들과 보호자분들은 내 간호복을 붙잡고 “누구 뽑을껴?” 묻곤 했고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누군가가 “젊으니까 진보 뽑겠지!”라고 하면 어르신들은 왜 진보를 뽑으면 안 되는지 나에게 일장연설을 하셨다. 내가 아무리 “저는 비밀 선거의 원칙을 준수합니다.” 라고 해도 듣지를 않으셨다. 전쟁을 몸으로 겪으신 세대라서 더 민감하다는 건 알지만 진보는 ‘절대 악’이고 보수는 ‘절대 선’ 이라는 극단적 논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에게 보수를 뽑으라는 환자분들의 압박이 거세어 업무를 하기 힘들 정도가 되자 어느 날 나는 참지 못하고 병실 안에서 큰 소리로 외쳐버렸다.


“환자분들이 저보다 두 배도 더 긴 세월을 살아오셨고 더 많은 경험을 하신 건 존중하지만 저도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성인이에요. 그리고 저는 간호사로서 환자를 간호하려고 병원에 있는 사람이예요. 제 존재 이유에만 충실할 수 있도록 협조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 시간 이후로 저한테 환자 분들의 상태나 치료, 진료 이외의 것들 물어보시면 저는 답변 안합니다. 아시겠어요?”



그 이후로는 조용해졌다.


어찌 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내 앞에 있는 이 사람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늘 하던 것처럼 하면 된다. 가치판단은 간호사로서 나의 몫이 아니다. 내가 신경써야 할 것은 환자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최선의 상태에 있는가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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