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레드북과 함께하는 인생여행, 이레

정신의 분리, 더 깊은 곳으로, 아니마의 진화 단계

by 해리포테이토

융은 무의식으로의 하강을 겪은 뒤, 그 지옥에 대한 탐사가 스스로 지옥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걸 느끼며 갈등을 겪는다. '정신의 분리'다. 정신이 나뉜 것은 갈등이며 혼란이다. 그는 이 내면 탐사가 스스로를 악마 같은 형태로 자신을 바꾸어 놓았다고, "나의 인간성을 괴상한 동물의 형태와 바꾼 것 같"다고 분노를 터뜨린다. 그러자 깊은 곳의 정신이,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라"라고 말하고, 융은 어떻게 내려가냐고, 자기 스스로 못한다고 분개하며 외친다. 영혼이 그에게 다가오고, 융은 영혼과 대화를 한다. 이윽고 영혼이 말한다. 말은 필요하지 않다고, 지금 당신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고. 융은 고통과 분노로 괴로워하다가, 다시 사막에 서 있는 환상을 본다. 멀리 은둔자와 강도와 암살자, 독 묻은 화살을 본다. 그는 느낀다, 자신이 탐욕스러운 짐승으로 변한 것을.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은 분리되어야만 가능하다. 최소한의 거울이 있어야 한다. 융은 정신의 분리를 통해, 자신이 어떤 동물성을 가졌는지 아는 것이 가능했다. (환상 속에서 보았던 은둔자와 강도 및 암살자를 융은 곧 만난다) 진정한 자기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래되어서 사악해진 것들' 이를 테면, 자기가 영웅이 되는 것을 막는, 오래도록 영웅으로 내재화되어 있어 그 무엇, 그래서 자기의 삶의 길을 막는 사악한 것들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삶의 길을 계속 걸어야 하기에.


"지나치게 오래된 것은 모두 사악해진다." (49쪽)



나는 6장 정신의 분리에서 비로소 지난번 꿈에 나온 당나귀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융의 레드북을 읽는 것은 나 자신의 내면을 자극하는 일이며, 내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무의식으로 하강을 하고 있을 터. 낮동안 무의식에 대한 생각 없이 바쁘게 일을 하여도 밤에 잠에 들었을 때 나는 나의 지옥으로 내려간다. 그러던 중 무의식의 일부, 나의 동물성, 괴상한 동물성으로 변한 당나귀를 보게 된 것이다.


아주 오래된 소설인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소설, 루키우스 아폴레이우스의 소설) <황금당나귀>는 주인공 루키우스가 가진, (그는 마법사로 변신하여 부와 명예를 꿈꾸었는데) 욕망과 당나귀로의 변신, 가혹한 노동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다가 결국 마지막에 이시스 여신을 만나고 나서 비로소 인간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이시스 여신은 루키우스 내면의 아니마일 것이다. 남성 내면에 존재하는 여성성인 아니마는 네 단계로 진화한다. 아니마의 진화 단계는 '이브 - 헬레네 - 마리아 - 소피아'로 융 심리학은 본다. 소피아는 지혜로운 여성성이라는, '지혜' 자체의 추상적인 개념의 표현이다. 루키우스는 당나귀로 지내면서 내면의 여성성의 진화 단계를 거쳤을 것이다.


루키우스가 당나귀에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이시스 여신과의 만남 덕분이었는데, 이시스 여신은 마리아가 아니라 소피아의 단계일 것이다. 이 신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그런 신은 아니다.


융은 6장 정신의 분리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말한다. "만약에 어떤 신이 삶의 길이길 멈춘다면, 그 신은 은밀히 쓰러져야 한다."(49쪽)


나의 신이 '삶의 길'이길. 삶의 길이 아니라면, 은밀히 쓰러져 주길.




레드북 46쪽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06화레드북과 함께하는 인생여행, 엿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