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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재윤 Dec 25. 2021

13번 불합격의 끝에서

이대로 털썩 주저앉을 수 없었다

 

  바구니 안에 10개의 초콜릿이 있다. 10개의 초콜릿을 다 먹은 상황을 수식으로 나타내면 10-10=0이다. 숫자 0은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한다.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질 때와 같다. 삶에서 숫자 0은 “없음, 무기력함, 공허함”이란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런데 과연 그게 다일까? 숫자 0엔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다.

  위의 그림처럼 숫자 0은 양의 정수와 음의 정수를 가르는 기준점이다. 양의 정수란 자연수에 양의 부호 +를 붙인 수 +1, +2, +3, … 을 말하며 음의 정수란 자연수에 음의 부호 –를 붙인 수 –1, -2, -3, … 을 말한다. 삶에서 0은 기준점으로 사용한다. 지표면을 기준으로 플러스 방향이면 지상층 마이너스 방향이면 지하층이다. 지상과 지하를 나누는 지표면이 숫자 0이다. 0도를 기점으로 기온이 플러스면 영상이고 기온이 마이너스면 영하이다. 통장 잔액은 0원을 기준으로 돈이 들어오면 플러스 통장이고 돈이 빠져나가면 마이너스 통장이다. 숫자 0은 플러스의 방향과 마이너스의 방향을 결정짓는 기준점이다.


  삶이 무기력하다고 느껴질 때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는 숫자 0이 떠오를 수 있다. 하지만 기준점으로서 0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플러스 방향 혹은 마이너스 방향으로 가는 선택의 순간에 있는 것이다.


숫자 0의 다른 말은 바로 기회다.


  스무 살엔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과제 제출할 때 투덜거리며 해야 했을 일이었다. 그러나 군 입대 후 글쓰기와 친구가 되었다. 휴대폰을 사용할 수 없었고 TV 보는 일에도 흥미가 없었기에 노란색 메모지와 연필로 끄적이며 나만의 세상을 그렸다. 다 쓴 글을 네이버 블로그에 종종 올렸다. 방문자 수가 두 자리를 넘어가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누군가 댓글을 달아주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더 많은 독자를 만나고 싶다고 느꼈을 그때 문득 ‘작가가 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카오 브런치 작가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면 외부 사이트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었고 브런치 제작진으로부터 인정받은 글은 카카오톡 채널 메인에 실렸다. 고립된 글쓰기가 아닌 독자들과 만나는 글쓰기. 은유 작가의 말처럼 함께 손잡고 생각의 징검다리를 건너듯이 내 글을 읽어주는 독자들과 함께 성장하고 싶었다.


  군인은 밤 10시부터 취침 시간이지만 12시가 넘어 잠든 적이 많았다.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노란색 메모지에 문장을 쓰고 지웠다. 그만큼 브런치 작가가 되고 싶었다. 브런치 정식 연재를 위해서는 작가 신청을 한 뒤 브런치 제작진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난 간단한 자기소개와 연재 방향성 그리고 여태껏 쓴 글을 모아 브런치 제작진에게 보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브런치 제작진의 승인 대신 불합격 통보 메일이었다. 글을 다시 고치고 메일을 보내도 변함없었다. 준비 기간은 벌써 1년 가까이 되었고 탈락 횟수만 벌써 13번이다.


  13번째 떨어졌을 때 난 멍하니 컴퓨터 책상에 앉아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브런치 작가로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라는 문구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정말 될 줄 알았는데….’ 다 해져버린 메모지가 쓸모없어 보일 만큼 절망감에 빠졌다. 손때 묻은 샤프와 메모지를 서랍에 던지며 씩씩거렸다. ‘이젠 글을 써도 예전만큼 행복하지 않을 거야. 이제부터 무엇에 기대며 살아야 할까.’ 뭘 해도 나아지지 않을 거란 부정적인 감정은 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마치 숫자 0과 같았다.


  그래도 내가 다시 샤프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언젠가 내 글을 읽어줄 독자들이 있을 거란 믿음 때문이었다. 비록 지금은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글에 불과하지만 언젠가 수많은 독자들과 소통하는 사람이 되어있을 거라고. 상상만 해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래, 이대로 털썩 주저앉을 수 없었다.


  합격 메일은 제대하고 6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받을 수 있었다. 무려 13번의 불합격 통보 메일을 받고서 얻은 합격이었다. 너무 기뻐 환호성을 질렀다. 합격이란 글씨가 잘 못써져 있는 게 아닐까. 행여나 메일에 오류가 있을까 봐 메일함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발꿈치부터 머리까지 소름이 돋는 경험이었다. 날 응원했던 친구들은 날 보며 13전 14기라며 축하했고 내 끈기와 노력이 대단하다며 감탄했다. 무엇보다 독자들에게 내 진심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는 0을 기준으로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결정되듯 기회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기회를 잡아 플러스로 향할지 절망감에 사로잡혀 마이너스로 향할지는 내 선택에 달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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