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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재윤 Oct 07. 2022

슬픔을 위로하는 슬픔

서랍 한 켠에 구겨진 종이를 찾았다

 음수 곱하기 음수는 왜 양수일까? 수직선으로 간단히 증명할 수 있다. 우선 양수 곱하기 양수를 생각하자. 3에 2를 곱하는 것은 3을 2번 더하는 것이다. 이를 수직선 위에 나타내면 0에서 3만큼 오른쪽으로 두 번 이동하는 것과 같다.



-3에 2를 곱하는 것은 –3을 2번 이동하는 것과 같다. 0에서 3만큼 왼쪽으로 두 번 이동하면 된다. 

3에 –2를 곱하는 것은 3만큼을 반대 방향으로 두 번 이동하는 것이다.  

-3에 –2를 곱하는 것은 –3만큼을 반대 방향으로 두 번 이동하는 것과 같다. 즉 3을 2번 더하는 것과 같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이너스 숫자에 마이너스를 곱하면 반드시 플러스가 된다. 이 수학적 사실은 슬픔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를 알려준다. 

 

  서랍을 뒤척이다가 우연히 어렸을 때 썼던 글들을 모아둔 상자를 발견했다. 이리저리 구겨진 종이 한 장이 알록달록한 편지들 사이에 껴있었다. 마치 날 알아봐 달라는 것만 같았다. 판도라의 상자 같았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종이를 펼쳤다. 중학교 1학년 때 국어 수행평가로 적었던 글이었다. 글의 제목은 수학여행. 난 글을 다 읽고 나서야 왜 이 종이가 상자에 구겨진 상태로 있었는지 깨달았다. 종이에 적힌 내용은 마치 잔인한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처럼 실로 고통스러웠다. 글 내용은 다음고 같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은 정말 즐거웠는데 요번 중1 수학여행은 즐겁지 않다.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이 안 계셨다면 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5월 18일 O리조트에서 있었던 일이다. 점심시간이 끝난 뒤 친구들과 나는 난타를 치기 위해 강당으로 모였다. 강당엔 파란색 플라스틱 물통들이 줄지어 있었다. 친구들은 시험지를 뒤로 넘기는 것처럼 북채 2개를 뒷사람에게 넘겼다. 그런데 내 앞에 앉아있던 그 녀석(여기서 그 녀석은 날 지독하게 괴롭히던 녀석이다.)은 나에게 북채를 주지 않고 다른 친구에게 넘겼다. 나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해 무척 기분이 나빴다. 그 녀석에게 채를 달라고 말하자 그 녀석은 날 보고 “*맞짱 뜰까? 개XX야?”라고 말했다. 난 무서워 입을 다물었다. 
(*맞짱 뜰까 : 일대일로 맞서 싸우는 것의 속된 표현)
  난타 행사가 끝나고 그 녀석은 숙소에 들어와 나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때 TV를 보고 있었던 진수가 와서 둘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녀석은 진수에게 얘가 나 때리고 욕을 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나는 나 혼자 참고 넘기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담임선생님에게 그 녀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말했다. 
  수학여행이 끝나고 담임선생님은 나와 그 녀석을 교무실에 불렀다. 담임선생님은 하키채로 그 녀석을 두들겼다. 며칠이 지난 뒤 그 녀석은 내 엉덩이에 시퍼렇게 멍이 든 걸 좀 보라며 자신의 엉덩이를 반 아이들에게 보여줬다. 전장에서 살아남은 장수처럼 말하는 태도가 너무 역겨웠다.


  수행평가로 적었던 글의 내용은 여기까지. 수학여행 이후 그 녀석과 1년 동안 별일 없이 지냈지만, 중학교 2학년 때 그 녀석과 어울리는 패거리들에게 심한 모욕을 당했다. 그 녀석은 날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는 듯이 심하게 소리쳤다. “맞짱 한번 뜨자 이 씨X 새끼야. 그럼 뭔데? 벙어리냐? 벙어리냐고? 왜 말을 못 하냐? 병X이니?” 그 녀석은 내 가슴을 툭툭 때렸다. 다른 녀석들은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찍어댔다. 그 녀석은 옥상으로 따라오라며 날 협박했다. 난 내일이 시험이니까 제발 한 번만 봐달라고 싹싹 빌었다. 그 녀석들은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남긴 채 낄낄거리며 교실을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분명 낮인데 온 세상은 캄캄했다. 난 씩씩거리며 아파트 계단을 올라갔다. 내가 죽어야지 죽어야겠다. 차라리 내가 사라지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계단 끝이 보이면 난 뛰어내려야겠다. 옥상 14층에 도달했다. 내 키 정도 되어 보이는 담장에 몸을 기댄채 밑을 내려봤다. 사람들은 레고 블록처럼 작았고 자동차는 장난감 차 같았다. 막상 뛰어내리려고 하니 오금이 저렸다. ‘떨어져서 땅에 머리가 터지면 아프지 않을까.’ 난 죽을 용기조차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날 밤 이불을 부여잡고 소리 없이 울었다.




  슬픔을 위로하는 슬픔. 울부짖는 자들의 서늘한 옷자락에 뜨거운 눈물로 젖은 내 얼굴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다. 그러니 나와 같이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면 눈물을 닦아주며 말하고 싶다. 실컷 울라고. 얼굴이 콧물 범벅이 되어도 괜찮으니 우선 엉엉 울어야 한다고. 나와 당신이 겪었던 아픔이 얼마나 찢어질 듯이 아프고 지워버리고 싶었는지. 당신이 조금 진정되고 훌쩍거릴 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마이너스끼리 곱하면 플러스가 되듯 우리도 괜찮아질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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