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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Oct 17. 2022

추임새


도자기 물레 수업 시간.

고블렛 잔을 *정형(기물을 반건조시킨 후 기물의 밑면을 다듬어 내는 과정) 하기 전에 한참 동안 기물을 손에 올려놓고 돌려봤다.

'어떤 모양으로 깎아낼까? 가운데가 구슬처럼 볼록 튀어나오게 할까, 아니면 다리까지 쭉 뻗는 날렵한 허리?'


"뭐 하세요?" 선생님이 물으셨다.

"어떤 형태로 깎아줄까 고민 중이에요."

"아주 좋아요."


정형한 기물이 내가 생각한 것과 딱 맞아떨어질 때는 드물지만 그래도 기물은 비슷하게 내 생각의 형태를 보여준다. 게다가 내가 그 형태를 만들어 내고 그 형태를 갖는다.

워낙 사는 방식이 추상적인 사람이라 꿈속을 걷는 것처럼 허우적거릴 때가 많은데 도자기는 형태를 띤다. 손으로 고스란히 전해져 오던 감각이 어느새 형태가 되어 눈앞에 놓일 때면 '이런 게 사는 거구나' 하나의 답을 얻는 것 같다.


시와 도자기는 닮았다. 

내 생각과 딱 들어 맞을 때가 많지는 않지만 비슷하게 내 생각을 보여준다.

그리고 기본적인 생활을 하는 데는 별 쓸모(?) 없지만 삶을 아름답게 해 준다. 풍요롭게 해 준다.

판소리의 추임새 같다. "얼쑤, 잘한다, 으이!"

요즘 티브이 프로의 리액션이라고나 할까?


도자기를 배우러 가는 길은 내 삶에 추임새를 넣으러 가는 길이다.

'으이'하면서 흙이 날아간다. '얼쑤' 하면서 작은 컵 하나가 나오고 '잘한다' 하면서 고블렛 잔이 만들어진다.


시를 쓰는 것도 같다.

'으이?' 이 거 시 맞아? 아무리 '못된' 시라지만 너무하잖아.

'얼쑤!' 시를 쓰면 행복해, 네 마음을 들어봐. 

'잘한다' 그래 이렇게 좋은 시도 나오네.


추임새 없는 삶은 지루하다. 졸리고 때로는 숨을 조여 온다.

자신의 인생에 추임새 한 자락 넣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축복을 즐길 줄 모르는 직무유기다. 그 형벌은 끝없는 지루함이라는 나락이다.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보면 삶의 종착지는 하나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겨울을 견딘 인동초의 푸른 잎사귀를 보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숨결을 느끼지 못한다.

늪, 깊은 늪에 빠져버린다.

어둠조차 삼켜버리는 늪이었다.


도자기와 글짓기라는 나의 추임새를 찾으면서 흥을 얻었다. 

추임새 자락에 취해 가끔은 세상을 잊고  흙처럼 물레 위를 빙글빙글 돌기도 한다. 누구도 풀 수 없는 암호 같은 시를 쓰고 혼자 웃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인생이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볼을 스치는 인동초 꽃 향기에 눈을 뜨고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마주 보게 된다.

늪, 깊은 늪이 하얗게 터져버린다.

늪은 허상이란 것을 깨달았다.


추임새


둥둥 북 울리는 산에 소려가 살었는디

첩첩산중 보이는 건 바람과 고라니뿐이더라

으잇!

졸고 졸다 눈을 겨우 뜨고

두리번두리번거리는디

저것이 무엇이다

얼쑤!

돌고 돌아가는 것이 방아도 아니고

동글동글 돌아가는 것이

물레인지라

잘한다!


허겁지겁 달려가 물레 앞에 앉았는디

물레 돌아간다 물레 돌아간다

쌓다 내렸다 쌓다 내렸다

내렸다 쌓다 내렸다 쌓다

무엇을 쌓는디?


그라게

가만가만

그 위에 올라앉은 것이 무엇이여

흙이여 사람이여

으잇!


가만 있어보랑게

희고 고운 것이?

도자기렷

얼쑤!


자스히 보니께

희고 고운 것이!

인생이렷다

잘 헌다!


          - 소려의 못된 시 ‘추임새’


도자기에 관한 글을 시작하면서 시를 한 편씩 쓰게 된 데는 몇 년 전 읽었던 마종기 님의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덕이 크다.

마종기 님은 자신의 삶을 반추하면서 자신의 시를 한 편씩 읽어준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의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아픔을 에세이로 풀어내고 자신의 마음을 시로 자아낸다.

시험을 보고 난 후 친구들이 달려와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 왜 기린이 아니고 사슴이냐고 물었다는 대목에서는 풋, 웃음이 나왔다. 내 이과 친구들한테 많이 듣던 소리였다. 그 친구들한테 설명을 해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마종기 님과 나만 알고 있는 것 같아 뿌듯했다.

더 이상 시가 어렵지 않았다. 에세이로 풀어낸 인생과 시로 응축시킨 마음이 선명히 보였다.

나도 그런 에세이를 쓰고 싶었다. 그런 시를 담고 싶어졌다.


추임새를 넣듯 내 에세이에 시를 담았다. 에세이가 편하게 시에게 기댔고 시는 에세이를 안아주었다.

글은 또 다른 형태가 되어 내 손에 놓였다.


오늘도 내 인생에 나만의 추임새를 넣어본다.

도자기를 빚어내고 에세이를 쓰고 시를 짓는다.

으잇! 얼쑤! 잘한다!

내 인생의 추임새 세 자락이다.


*정형(https://brunch.co.kr/@hyec777/316)

*참고문헌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마종기 지음, 비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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