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줄을 서세요. 두 번째 줄 조금만 뒤로 가 주실래요. 그 뒷분, 네. 안 보이시니까 살짝 옆으로 서주세요.
자, 찍습니다. 눈 감으시면 안 돼요. 하나, 둘.
내 시간의 흔적들을 모아 단체 사진을 찍던 날,
햇살이 떼구루루 그릇을 타고 들어와 엉덩방아를 찧었다.
내가 빚은 아이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갈비뼈를 다친 후 공방에 못 나간 지 2주가 넘어가고 있었다. 선생님은 몸이 먼저라며 배려해주셨지만 내 시간을 그대로 비워놓고 계실 테니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러다 카카오톡이 왔다.
"전에 빚으셨던 그릇들 다 구워놨으니까 시간 되시면 찾아가세요."
선생님 톡에 내가 빚었던 그릇들이 떠올랐다. 몇 개였더라. 이번엔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해서 이상한 모양도 많은 텐데, 깨지지는 않았을까? 이번엔 *환원방식으로 구워주신다고 했는데 어떤 분위기가 날까?
남편에게 부탁을 했다.
"내 새끼들 좀 찾아다 주세요~!"
남편은 종이상자 하나를 들고나갔고 상자를 가득 채워왔다.
갈비뼈 아픈 것도 잊고 쭈그리고 앉아 그릇들을 꺼냈다.
아이고 귀여워라.
이 녀석은 입이 찌그러졌네.
이 녀석은 가분수라서 서 있을 수 있을까?
이 녀석은 크기도 적당하고 그립감도 좋은데….
개성 가득 입을 삐딱하게 내민 그릇도 있었다.
전에 가져왔던 그릇들이랑 모아보니 그 수가 꽤 되었다. 죽 늘어놓으니 '보기에 좋았더라.'
"내 시간의 흔적들, 잘 빚어졌구나."
햇살이 좋은 날을 골라 남쪽 평상에 줄을 세웠다. 단체 사진을 찍었다. 올망졸망 모인 아이들은 세수도 하지 않았지만 그대로 고왔다.
다 구워 놨으니 하나둘 분가를 시켜야 할 것이다. 친구들이 찾아오면 하나씩, 친척들이 오면 하나씩 데리고 갈 것이다. 그렇게 나를 떠나갈 것이다.
"앞으로는 이렇게 다 같이 모여있기 힘들 거야."
나는 사진을 찍으며 이른 작별인사를 했다.
예쁘고 잘 생긴 그릇들부터 떠나가겠지. 그리고 내 곁에는 깨지고 찌그러진 것들만 남을 것이다.
내 눈에는 다 귀하니까 상관없다. 대신 분가시키기 전에 실컷 만져보고 써야겠다.
구찌뽕 와인을 한잔씩 담아봤다. 남편이 직접 따서 씻고 발효를 시킨 구찌뽕 와인은 색깔이 고왔다. 나는 탄산수에 얼음을 가득 넣어 술 같지 않은 주홍빛 구찌뽕 음료를 완성했다. 남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다른 모습으로 만나 서로를 안아주었다.
남편의 구찌뽕 와인과 나의 도자기
"짠!"
가분수 고블렛 잔이 머리를 흔들거렸다. 기특하게도 둥근 다리에 힘을 주고 단단히 서 있었다.
"음료를 담기엔 주둥이가 너무 크군."
"다리가 좀 더 넓으면 안정적이겠죠?"
남편과 품평회를 하며 잔을 기울였다. 주홍빛 호수가 내 시간 속에서 찰랑거렸다.
난 내 시간들을 빚어냈고 그 시간들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떠나보낼 준비를 한다.
흘러가는 시간이 두렵기만 했었는데 이젠 편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나 뭐 하고 사는 거지?' 하며 나의 '소용(所用)'을 찾던 시간조차 과거로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내 시간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살다가 보내주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흐르는 것이 시간이라 살아 있는 동안 내가 빚을 수 있는 시간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때론 슬픔에 겨워 시간에 짓눌리겠지.
때론 행복에 겨워 시간 위에서 덩실덩실 춤도 추겠지.
그래도 시간은 조용히 흐를 것이다. 내가 빚는 대로 자신의 마음과 몸을 맡긴 채.
시간을 빚다
시간아
시간아
나 네가 미웠다
왜 나를 네 속에 가두는지
왜 나를 버려두지 않는지
너를 만나 난 존재가 되었지
나의 존재가 버겁던 날이면
나 너를 원망했다
네가 건네준 벚꽃은 허공에 휘날렸고
네가 따다준 월하시 감은 떫디 떫었다
나 네가 미웠다
시간아
시간아
물레 위에 너를 앉혀 빚던 날
뚝뚝 떨어지는 너의 눈물
우리 처음 마주 앉아
서로를 바로 보았지
내 손에 안긴
맑은 눈망울
너 그대로 고았구나
시간아
벚꽃 한 잎 웃음에 띄우고
월하시는 곶감으로 말려
네 가는 손에 들려 보낸다
나 너를 빚어 너를 보낸다
시간아 시간아
내 고운
시간아
소려의 못된 시 '시간을 빚다'
*환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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