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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성호 Aug 22. 2018

이상과 현실의 교집합

꿈을 꼭 양손으로 움켜쥘 필요는 없는거야.


스물여덟에 힘겹게 사원증을 목에 건 두 명의 신입 사원이 있었다. 신입 사원 A는 지방대를 졸업하고 반년간 필리핀 어학연수를 다녀왔지만 번번이 취직에 실패해 오랫동안 추운 나날을 보냈고, 신입 사원 B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많은 일을 했지만 역시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긴 세월을 방황했다.


신입 사원 B는 바로 나, 신입 사원 A는 나의 입사 동기이다. 우린 이전까지 완벽하게 다른 삶을 살았으나 결과적으로 같은 계절에 같은 사원증을 목에 걸었고, 같은 연봉 계약서 위에 각자의 서명을 남겼다. 그리고 우리 둘은 막연히 괜찮은 급여를 받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달리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려운 취업문을 통과한 터라 주어진 상황에 나름의 이유를 붙여 가며 스스로를 설득하고 합리화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 힘든 취직에 성공한 것 아니냐며, 연봉은 차차 오르지 않겠냐며…….




꿈꾸던 유토피아는 그저 새로운 시작점일 뿐이었다.


...

그로부터 약 1년 후, 스물아홉이 된 동기와 나는 비슷한 시기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동기는 회사를 그만둔 후 짧은 배낭여행을 한 번 더 다녀왔고, 그 후로 조금 더 높은 연봉을 책정해 주겠다는 회사를 찾아갔다. 반면 나는 독립출판 작가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다, 다시 해가 바뀐 서른의 봄날에 제자리로 돌아와 회사일과 글 쓰는 일을 병행하며 매일의 사투를 이어 가고 있다.


고백하건대, 직장이라는 울타리만 벗어나면 나 자신이 밀림의 타잔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은 예상보다 훨씬 만만치 않았고, 현실의 족쇄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내 발목을 힘껏 부여잡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같은 상황은 내 삶에 종종 들이닥쳤던 것 같다. 교복을 입던 학창 시절에도, 군복을 입던 장병 시절에도, 퇴사할 당시에도 ‘여기만 벗어나면 그땐 내 세상이야.’라고 생각했었지만, 그 자리를 벗어나 맞닥뜨린 곳은 내가 꿈꾸던 유토피아가 아니었다. 그곳은 뭐랄까, 그저 또 다른 시작점에 불과했다. 새로운 레이스가 시작되는 출발선상의 지점 말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어쩌면 영화 「메이즈 러너」 속 인물들처럼 저 앞에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채로 그저 무조건 달려야 하는 숙명에 노출돼 있는지도 모른다. 거대한 벽에 막혀 제자리로 돌아올지라도, 결코 쓰러뜨릴 수 없을 것만 같은 괴물을 만날지라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복잡한 미로에서 자신만의 길과 답을 찾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그런 모험의 숙명.




가족에게 보여줘야만 하는 스스로의 의무


...

문득 스물여덟의 마지막 밤이 기억난다. 내가 가족들에게 퇴사를 통보한 날이었다. 이날의 선언은 일순간에 엄마와 나 사이를 갈라놓았다. 아들의 갑작스런 퇴사 소식에 적잖이 당황한 엄마는 열흘이 넘도록 나와 말을 섞지 않았고, 나 또한 엄마를 피해 아침 댓바람부터 도망치듯 카페로 떠나기 일쑤였다. 고맙게도 형은 먼저 내 편이 되어 주었고, 우리는 호프집에서 맥주잔을 부딪치며 그간의 서운함과 오해를 한 모금에 털어 삼켰다.


엄마와의 관계는 서서히 회복되었다. 언제나 그랬듯 자연스럽게, 아주 천천히……. 나중에는 새벽잠과 바꿔 가며 글 쓰는 아들이 애처로웠는지, 엄마는 말없이 방문을 열고 책상 앞에 과일을 올려놓곤 했다.


계절이 바뀔 무렵 첫 책이 발간되자 그때부터 엄마는 온 지인에게 책을 홍보하는 중개인이자 영업 사원이 되었다. 첫 책의 표지 디자인이 확정된 시점부터 엄마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줄곧 나의 책 표지였고, 아마도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그럴 것이다.


물론 여전히 엄마는 나의 미래를 걱정하는 말을 툭툭 내려놓곤 한다. 일을 두 개나 하고 있음에도 모아 놓은 돈 하나 없는 나의 현실을 염려하는 것이다. 그 마음을 알기에 나는 보여 주고 싶고, 보여 줘야 한다. 현실에 끌려다니느라 정신없는 모습이 아닌 매일매일 싱싱하게 움직이는 내 모습을, 서점 매대 앞쪽에 놓인 내 이름 석 자와 나의 책들을.




양손이 힘들다면 한 손이라도


...

내가 원하는 길에서 지속적인 수익을 창출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정말이지 나의 오랜 꿈이자 바람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궤도에 오르기까지는 고난의 여정을 거쳐야 하며, 그 과정에서 밥벌이는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신성한 의무이다.


한 예로 소설 『편의점 인간』의 작가 무라타 사야카는 책을 내고도 줄곧 편의점 일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저자 사인회를 자기가 일하는 편의점에서 열었을 정도로 그는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꿈이라는 게 반드시 양손으로 꽉 움켜쥐어야 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때론 녹록지 않은 현실에 한 손이 머물게 되더라도, 남은 한 손에 소중히 꿈을 쥐고 달려가면 될 것이다. 거친 파고가 집요하게 앞길을 막아서도, 달콤한 말로 힘들면 쉬어도 된다고 속삭여도, 때로는 너의 무모함이 너를 파괴할 거라고 무섭게 겁을 주어도, 결코 패배를 선언해선 안 된다. 가끔 감당하기 힘들 만큼 거세게 밀려올 땐 한 발짝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을지라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그토록 우리를 괴롭히던 현실이라는 지독한 경쟁자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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