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도 든든히 채웠으니 어딘가 콕 박혀 있는 벚꽃을 찾아 헤맨다. 호텔에서 빌린 자전거를 타고 다케오 명소 ‘미후네야마 라쿠엔’을 찾았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산을 끼고 있는 정원. 미후네 산의 암벽을 둘러싸고 피고 지는 꽃들과 계절 따라 옷을 갈아입는 풍광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특히 15만 평이나 되는 정원에 만개하는 벚꽃, 벚꽃 가고 난 자리에 피는 붉은 철쭉, 초록잎을 드리운 뜨거운 여름을 지나 알록달록 물드는 가을 단풍은 이곳을 찾는 이유다. 내가 찾은 날이 흐려서였을까?! 아니면 가는 길이 생각보다 멀고 자전거를 타기에 좀 위험한 곳들이 군데군데 있어서였을까?! 기대했던 만큼 예쁜 정원은 아니었다. 한껏 들떠 벚꽃 찾아 떠나왔으나 만개하지 않은 꽃들을 보고 실망해서 인지 맹숭맹숭하다. 정원 내에 추가금을 내고 들어가는 팀랩(TeamLab). 구글리뷰에서는 칭찬일색인데 들뜨지 않은 마음 때문인지 컴컴한 공간을 빨리 빠져나가고 싶을 뿐이다. 어두운 공간을 헤매다 발길 닿는 곳으로 가니 호텔 객실로 이어진다. ‘재미있는 공간이네! 폐허가 된 호텔 목욕탕 일부를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다니 대단한걸?!’ 자연풍광이 좋아 찾았으나 기대에 못 미쳐 실망한 내 마음. 그 마음 앞에 놓인 인위적인 디지털 작품들은 큰 감흥은 없었지만 버려진 공간을 재활용해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한 이곳이 무척이나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렇게도 사용될 수 있구나! 공간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구나!’ 먼 길 이곳을 찾아온 이들에게 자연 이외의 또 다른 즐거움을 제공한다.
마후네야마 라쿠엔은 방문시기를 잘 잡아야 한다. 벚꽃이 만개하거나 철쭉이 활짝 피었거나 혹은 고운 단풍이 들었거나. 이때 찾아 자연에 감탄하고 ‘팀랩’ 전시 작품을 보면 금상첨화다. 비록 나의 경우 기대했던 만개한 벚꽃은 빗겼지만 ‘팀랩’ 공간은 분명 색다른 경험이었다.
팀랩 '목욕탕 폐허의 거석’ 이곳에 핀 벚꽃 (左) / 어두운 터널을 나와 객실 복도를 지나 만난 '숲과 회전하는 나선형 램프' (右)
암벽 아래 푸른 잎들이 철쭉 시즌에 붉게 물든다(左) / 야간 라이트업을 위해 조명 설치하는 나룻배 (右)
정원 내 붉게 떨어진 동백꽃 (좌) / 호텔에서 빌린 이번 여행 동반자, 자전거
벚꽃은 없겠지만 그래도 간다. 엔노지산도(円応寺参道)
다케오의 또 다른 벚꽃 명소. 엔노지산도. 불교사찰로 올라가는 핑크 터널이 예술이다. 벚꽃이 기깔나게 흐드러지게 핀 날을 잡아 찍은 사진을 보고 그 어디도 아닌 다케오에 벚꽃 베이스캠프를 차리게 됐다. 물론 보기 좋게 비껴갔지만 말이다. 미후네야마 라쿠엔에서 본 벚꽃들이 ‘아이 추워!’하고 웅크리고 있어 이곳 역시 그럴 것이라 예상은 했다. 역시나다. 앙 다문 입들이 야속하다. 아쉽다. 다시 올 이유를 만들어주나 보다. 사실 엔노지산도는 벚꽃 터널 외에 볼거리가 없다. 사찰로 올라가는 길에 묘지와 드문 드문 인가가 있을 뿐이다. 아쉽지만 “안녕! 다시 만나!”하고 재빨리 자전거 핸들을 돌려 마지막 종착지 로몬으로 향한다.
날도 흐리고 벚꽃은 감감 무소식이고 나는 아쉽고!
드디어 갔다. 로몬!
호텔에서 빌린 자전거는 일반 자전거다. 전에 관광안내소에서 빌린 자전거는 전기 자전거라 한 발을 구르면 쉽게 앞으로 나아갔는데 이 자전거는 열심히 발을 굴려야 한다. 거짓이 없다. 영차 영차! ‘미후네야마 라쿠엔’에서 ‘엔노지산도’까지 갔다 다시 ‘로몬’으로 가니 쌀쌀한 봄날이지만 등에 땀이 베인다. 적당히 온천하기 좋은 때다. 로몬은 타츠노 킨노(도쿄역과 한국은행 설계)에 의해 1915년 건축됐으며 현재 일본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지어져 신기하다. 특히 밤에 불을 밝히며 붉게 이글거리는 건물이 강렬해 한 걸음 물러 서게 만든다.
로몬을 지나 좀 더 안으로 들어가면 여러 온천 시설들이 있는데 그중에 야외 노천탕이 있는 ‘사기노유’를 선택했다. 오래도록 온천욕을 하려면 공기순환이 잘 되는 야외여야 한다. 자판기에서 입장권을 끊고 들어가 본다. 어린 시절을 보낸 ‘연천’ 읍내 목욕탕 보다도 작은 실내탕. 실내탕 출입문 옆 실외탕. 단출하지만 온천욕을 즐기기에 충분하다. 이 작은 공간을 어떻게 알고 왔는지 서양 언니들도 입장하신다. 서로 부끄럽지만 모두 같은 탕에 몸을 담근다. 동서양의 화합이다.
탕 안에 앉아 바삐 보낸 하루를 되돌아본다. ‘나’란 사람, 여행도 그놈의 컨셉에 맞춰 최선을 다하고 있다. 매장 오픈할 때마다 컨셉에 맞춰 오픈 마케팅을 준비했던 회사 시절이 떠오른다. A컨셉에 맞춰 보고를 하면 그건 아니라고 해 또 다른 컨셉 B가 등장한다. 그에 따른 마케팅 실행 안들이 줄줄이 수정된다. 더 나은 결과물을 위해 수정, 보완하는 즐거웠던 과정이 오픈이 겹치고 시간에 쫓기다 보면 숨통이 조여져 왔다. 꼭 그러해야만 하는 건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그놈의 컨셉이 뭐라고! 회사는 나왔지만 가끔 부지불식간에 옛 기억이 불쑥불쑥 튀어 오른다.
벚꽃 피는 자연의 시간을 내가 맞출 수 없음에도 못내 아쉬운 여행이다. 아직도 여정이 남아있지만 목욕재계 하며 벚꽃에 대한 기대를 고이 접는다.
온천장을 찾은 미니미 차들, 그 넘어로 보이는 온천 박물관 '다케오온천 신관' (左) / 깜깜한 밤 불 타오르는 로몬 (右)
야외 탕이 있는 사기노유에서 온천을 즐기고 먹는 우유 (左) / 자판기에서 뽑는 사기노유 입장권 (右)
온센 후 라멘 말고 빠에야?!
만개한 벚꽃 시즌은 못 맞춰도 내 배꼽시계는 딱 맞췄다. 적당히 배고픈 저녁시간. 혼맥을 하며 식사할 수 있는 곳을 미리 봐두었다. 다만 메인 식사인 빠에야가 30분 이상 걸린다는 걸 식당을 방문하고서야 알았다. 우선 시키고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애피타이저 감바스로 허기를 달랜다. 물론 모공 깊숙이 배출된 수분 보충을 위한 생맥주는 필수! 시원하게 들이켜니 회사 떠난, 집 떠난 상념 따윈 단숨에 집어삼키고 적당히 취해 달떠들떠 한다. 이 맛에 늘 떠난다. 혼자 맥주를 들이켜니 바테이블에서 먹던 중년의 커플이 내게 관심을 보인다. “어디서 왔니?” 역시나 “혼자야?”, “여기 맥주 맛있어, 먹어봐” 아줌마, 아저씨도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르셔서 서로 통하지도 않는 일어와 영어, 한국말로 대화를 이어 나간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뒤늦게 나온 ‘먹물빠에야’ 품평과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는 거 그리고 젊은 주인장 언니에 대한 칭찬이다. 서로 좋은 이웃을 둔 모양이다. 간간히 들러 술잔을 기울이고 하루의 노곤함을 함께 털어낼 수 있는 이웃이 있어 좋아 보인다. 자리를 정리하고 나오는데 아주머니가 따라 나오시더니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신다. 좋지요! 잠시 스친 인연도 인연인데 함께 서로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쩜 다음에 다시 오면 같은 자리에 그대로 있으실 것 같다. 그때도 시원한 맥주잔과 함께 말이다. 그땐 합석하자고 해야지!
빠에야 나오는 동안 요기를 달랜 감바스와 생맥주 (左) / 먹물빠에야 너머 스친 인연, 아줌마와 아저씨 (右)
때를 맞추어서 찾아간 곳이지만 기대했던 때는 아직이다. 멋을 찾았지만 맛을 찾았다. 만개한 벚꽃 대신 낯선 이탈리아와 스페인 요리를 일본, 그것도 작은 시골동네에서 맛본다. 전과 같이 예기치 않은 곳으로 다케오 여행은 흐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마 다음에도 그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