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라노 산책 ep2. 모리노토케이 + 후라노 저녁 + 삿포로에 못 갈 뻔
후라노 산책 ep1. 바리스타트 + 닝구르테라스 에 이은 글입니다.
커피 곁들이 책 읽기 in 모리노토케이
혼자 온 데다 사람도 많지 않아 바테이블로 안내된다. 앉고 싶던 자리다. 비스듬히 경사진 산에 쌓인 흰 눈이 큰 창 너머로 쏟아져 들어올 것만 같다. 그 앞에 앉아 핸드밀 그라인더로 커피콩을 직접 갈아내니 고소한 커피 향이 내게로 스민다. 오늘은 바삐 가지 않아도 되니 천천히, 온전히 음미한다. 바 테이블 너머 친절한 직원이 다 갈린 커피가루를 간결하고 정성스럽게 내 눈앞에서 융드립 해준다. 작은 돈 주고받는 귀한 대접. 귀한 풍경이다. 커피는 찻잔 맛으로 먹는 내게 덧붙여 따라오는 다정하고 소중한 순간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호사스러운 책 읽기는 계속된다.
맥주는 말하는 것 같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더 나은 사람이 될 필요도 없어.
지금 맥주 한 잔이 주는 작은 기쁨을 밀어두지 않은 너는,
너에게 충분히 좋은 사람이야.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 한 잔의 맥주, 호시절의 기분. 김신지
커피 한 잔이 주는 작은 기쁨을 잊지 않고 깊은 숲 속까지 찾아온 나는 이미 충분히 나에게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늘 그럴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쉼이 좋은 순간
눈 뒤덮인 산장 속 향긋한 커피 한 잔과 느린 책 읽기. 서둘러 나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으니 더 귀하다. 단체투어로 왔다 모리노토케이에 오고 싶어 들렸는데 시간이 촉박해 결국 결제를 취소하고 나가는 커플을 옆에서 보니 내가 다 안타깝다. 그리고 내가 보내고 있는 이 시간이 귀 하디 귀한 시간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보내는 혼자만의 시간. 한껏 쉼을 부린 오늘도 감사하다. 이제 나도 슬슬 자리를 떠야 한다.
저녁 시간에 맞추어 호텔 셔틀버스를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 작은 동네라 인기 있는 맛집들은 이미 만석이다. 발길을 돌려 우연히 들어간 파스타집. 가려던 집을 못 간 아쉬움보다 기대하지 않았던 맛을 발견해 신이 난다. 우리 동네에선 먹지 못하는 생면 파스타. 식전 샐러드도 초록 잎에 드레싱만 얹은 것이 아니다. 알록달록 본연의 색감을 살려 굽고 절인 야채들이 작은 접시에 한가득 나온다. 먹어보지 못한 맛! 먹물 파스타면도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함이 배가 된다. 추운 겨울날 뜨끈한 국물 대신 선택한 어쩔 수 없는 선택치곤 꽤 근사한 한 끼 식사다. 여행의 맛은 언제나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우연히 찾아온다. 내 삶의 맛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흰 밭을 가르는 설국열차
후라노에 오던 날도, 이곳을 떠나는 날도 흰 눈이 펑펑 내린다. 아사히카와에서 후라노로 왔으나 보다 짧은 노선을 선택, 타키카와를 경유해 삿포로로 가기로 했다. 흰 눈은 하염없이 내린다. 무섭도록 내린다. 이곳에 올 때는 신비로운 겨울왕국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삿포로로 돌아갈 때는 무겁게 폭우처럼 내리는 눈발에 눈앞이 깜깜해진다. 아니나 다를까. 타키카와에서 타려던 기차가 많은 눈으로 선로가 차단되어 운행되지 않는단다. 같이 내린 사람들도, 역무원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다. 전광판 메시지와 역무원 안내 방송은 일어라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역무원에게 ‘삿포로로 가야 해요’ 하니 다른 열차를 안내해 준다. 안 물어봤으면 어쩔 뻔했나 아찔하다. 옆에 앉아있던 미국 아저씨에게도 표 바꿔서 다른 열차 타야 한다고 알려줬다. 오랜 기다림 끝에 탄 열차는 교과서에서 글로만 봤던 ‘오호츠크’ 선. 유빙이 둥둥 떠다니는, 언젠가 갈 곳 ‘아바시리’에서 오는 열차다. 내가 가보지 못한 미지의 지역에서 달려온 열차. 조렸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일정대로 삿포로에 당도할 수 있다는 안도감과 함께 신비 열차를 타는 듯해 가슴이 콩닥거린다. 따뜻한 열차에 앉아 있으니 흰 눈이 이젠 무섭지 않다. 흰 꽃길이다. 내가 가는 길이 오늘도 꽃길이다.
커피 한잔, 책장 한 장 '모리노토케이'
https://maps.app.goo.gl/PGDf6od7uiew5c837
차선이었지만 최선이었던 생면파스타 '린콘트로'
https://maps.app.goo.gl/qizuh71HFhEhZsGu8
커피와 함께 한 책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77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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