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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방의 공돌이 Aug 13. 2020

슬기롭지 않은 공장생활

나는 공장에 갔다. 퇴사 10년, 폐업 2년 만에 들어간 공장은 환경 관련 기기를 주문제작하는 곳이었다. 기기는 가정용 냉장고만한 크기로, 주민이 다 먹은 음료수 캔이나 페트병을 투입하면 압축해서 모으는 것이다. 제작자는 동티모르에서 온 밥과 나 두 명이었다.


나는 전기 기술자로 입사했다. 말이 기술자지, 난이도가 그리 높지 않는 단순작업에 가까운 일이었다. 처음 보는 기기였지만 딱히 공부할 건 없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기기의 후면에는 마이크로프로세서 보드와 전선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데, 단순한 기능에 비해 뭔 전선이 저리도 복잡하게 얽혀있는지 모르겠다. 이유를 알고 싶었으나 회로도가 없었다. 없는 건 회로도 뿐이 아니었다. 아니 모든 게 없었다. 조립도도 없고, 부품 리스트도 없고, 도면도 없었다. 그러니까 모든 게 작업자의 구전을 통해서 전래되어 온 전설의 기기 되시겠다.


일단 회로도가 필요했다. 기기 후면의 전선들을 일일이 눈으로 쫓아가며 회로도를 그렸다. 그래도 될 정도로 단순하고 간단한 회로니까. 10년 전 같았으면 한두 시간이면 했을 일을 일주일 동안 했다. 노안 때문이다. 눈으로 따라가던 전선을 자꾸만 놓쳐서 오래 걸렸다. 이래서 회사마다 45살을 안 뽑나보다. 나에게도 머리가 빠릿하게 돌아가는 시절이 있었다. 3년 전에 했던 회의의 참석자와 내용을 기억할 정도로 명석한 시절이 있었다. 이해력과 기억력 같은 것들이 점점 쇠퇴해 간다는 걸 45살이 되기 전에는 실감하지 못했다.


일주일 만에 회로도를 다 그렸다. 이 간단한 걸 그리는 데 일주일이나 걸리다니! 다 그려보니 복잡한 전선들은 대부분 쓸모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내가 입사하기 전,  이 사람은 전선을 저기에 붙이고, 저 사람은 전선을 여기에 붙이다가, 새로 온 누군가는 둘 다 붙인 게 아니었을까. 그런 일은 얼마간 반복된 것이 확실하다. 전설은 이렇게 만들어 지는 것인가 보다. 구전을 통해 전래된 이야기는 하나의 사실에 여러 사람의 망상과 바람이 합쳐져 전혀 다른 이야기의 전설이 되는 것이겠지. 이 기기도 제대로 된 조립도 하나 없이 이 사람 저 사람 제 멋대로 조립하다가 이 모양이 되었다.


불필요한 전선을 싹 걷어냈다. 속이 시원했다. 사장님도 놀라는 눈치였다. 근데 지금까지 이게 왜 이 모양이었는지 딱히 궁금해 하진 않았다. 그러니 이 모양이였겠지.

이런 아날로그적인 설비는 기능에 비례한다. 기능이 간단하면 설비도 간단하다. 뭔가 복잡하고 어려우면 의심해봐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말을 자주 쏟아내는 사람은 의심해봐야 한다. 사기꾼이거나, 속이 텅 빈 걸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말 많은 사람을 조심하자.)


할일은 자꾸만 눈에 띄었다.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조립설명서를 만들고 싶었다. 부품리스트도 만들고 싶고, AS 관리대장도 만들고 싶었다. 아무도 필요하다고 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큰일이다. 회사는 읍면지역 소재의 낡은 공장에 일하러 온 사람에게 성실함 이상의 직업정신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술자라고는 하지만 그다지 난이도가 높지 않고, 실제로 하는 일은 이런저런 잡일도 많기 때문이다. 일명 노가다 말이다.


노가다. 건설현장에서 하는 거칠고 힘든 작업을 일컫는 데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오늘날에는 화이트컬러 직군이 아닌 온몸의 근육을 이용하여 땀을 흘리고 손에 기름이나 때가 묻는 일과,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통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용례를 살펴보면, 노가다가 옷이 그게 뭐냐? (일하다보면 금방 때 묻을 건데 왜 그리 깨끗한 옷을 입고 왔느냐?), 노가다는 몸은 힘들어도 머리는 편해 (몸 쓰는 사람은 머리를 쓸 필요가 없어) 등이 있다.


회사는 기기 제작 말고도 제주도 내 광고판 관련 일을 한다. 각종 안내판과 현수막도 설치하고, 철물로 시설물도 제작, 설치한다. 안내판이나 시설물 제작을 위해 쇠를 자르고 갈아내기도 한다. 설치를 위해 땅도 파고 콘크리트도 치고 해머질도 한다. 회사는 나에게 그런 일이나 잘하길 바라지, 굳지 지금까지 없어도 별 일 없었던 자료나 만드는 데 시간이나 쓰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큰일 난 거다. 노가다는 노가다대로 최선을 다하고 또 다른 일거리들이 자꾸만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굳이 안 해도 될 일이고 굳이 내가 할 이유도 없다. 근데 그 불필요한 오지랖을 떠느라 아예 출근을 30분 일찍 했다. 이른 출근과 노가다 틈틈이 자료를 만들었다.

내 눈에 보이는 건 틈이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더 커질 틈, 결국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벌어져 버릴 틈 말이다. 하여튼 오지랖 하나는 타고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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