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시절예보 02화

[두번째 詩절예보]아빠라는 남자

그 시절 한 장 사진의 기억: 아빠와 걸었던 밤거리

by 은토끼
KakaoTalk_20190517_203749918.jpg


아빠는 체구가 작다. 키도 작고 살집도 없다. 평소에는 잘 못 느끼다가도 사진에 찍힌 뒷모습을 볼 때면 새삼 아빠의 등이 참 자그마하다는 걸 깨닫는다. 엄마가 아빠를 처음 외갓집에 인사시키러 데려왔을 때 외할아버지는 너무 못마땅해 부엌 뒷문으로 말도 없이 그냥 나가버리셨단다. 백팔십이 넘는 키에 뼈대도 굵으셨던 외할아버지 눈에는 아빠가 너무 왜소해 보였던 것이다.


아빠는 목소리도 작다. 말수는 적다 못해 없다. 상황만 허락된다면 하루 종일 한 마디도 안 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집에 손님이 오면 살갑게 대화를 나누는 건 늘 엄마 몫이다. 심지어 아빠 쪽 손님인 경우에도 그러하다. 사교적인 대화뿐만이 아니다. 아파트에 살 때 밤낮없이 쿵쾅거리는 윗집 소음에 대해 조용히 항의하는 것도 엄마 몫이었고, 언니가 자취방 전세금을 못 돌려받아 끙끙거릴 때 무시무시한 기세로 부동산에 전화해 5분 안에 입금완료 시키는 것도 엄마 몫이었다.


오랫동안 나에게 아빠는 배경 같은 존재였다. 어린 시절 엄마의 곱고 하얀 손을 잡기 위해 언니와 투쟁을 치른 기억은 있어도 아빠의 손을 잡기 위해 애쓴 기억은 없다. 아빠는 늘 과묵하고 감정의 동요도 별로 없는, 그냥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며 남자라는 성별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과 거리감은 아빠와의 사이를 더욱 벌려 놓기도 했다. 그러나 제법 어른 비슷한 것이 되어가다 보면 배경인 줄만 알았던 사람이 내 삶의 기둥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 순간들을 지나고 난 후 바라본 아빠는 내게 가장 애틋한 남자였다. 물론 내가 아빠를 아무리 애틋하게 생각한다 한들 아빠가 나를 애틋해하는 마음에는 언제나 미치지 못하겠지만.


외할아버지가 가시는 날까지 가장 의지하셨던 사위는 결국 아빠였다. 엄마는 답답할 정도로 말수가 없고 고집마저 센 아빠 때문에 속을 끓이시다가도 그래도 너희 아빠만한 사람이 없노라는 고백으로 매번 마무리를 지으신다. 아빠는 작지만 너른 사람이다. 살면서 아빠가 누구 흉보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아빠가 힘들다고 푸념하는 말을 들어본 기억도 없고, 무얼 해주고 나서 생색내는 말을 들어본 기억도 없다. 그런 아빠의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나도 다른 가족들도 짐작만 할뿐 결코 완전히 알지는 못할 것이다.


나이가 들어 바라본 아빠의 일상 속 모습을 담백하게 잘 그려놓은 마스다 미리의 책, <아빠라는 남자>의 표지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다가가면 갈수록 어려운 남자’


아빠는 어려운 남자다. 애틋해서 어렵고, 어려워서 애틋하다. 이 짧은 글을 완성하기 위해서도 몇 번이나 고치고 또 고쳐 썼는지 모른다. 그렇게 고쳐 썼는데도 충분하지 않은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아빠 팔짱을 껴본다. 두꺼운 겨울점퍼 너머로 마르고 단단한 아빠의 팔뚝을 느끼며 밤길을 나란히 걷는다. 내 키보다 별반 크지 않은 아빠에게 기대어 침묵 반 쓸데없는 말 반인 대화를 나눈다. 내가 아빠에 대해 분명히 아는 바는 하나뿐이다. 언젠가 아빠의 뒷모습이 작아지고, 아빠의 머리카락 위에 더 많은 눈이 내리고, 그러다 언젠가는 다시 볼 수 없게 되면 분명 나는 배경 없는 그림처럼 텅 빈 사람이 되어 울고 울고 또 울 것이라는 것.






머리칼 희어가고

목덜미 깊어가고

등허리 사위어가고

“아빠” 크게 불러도

뒤돌아보지 못하는

어느 밤 울 아버지 그믐달이 되었네.


부풀어 빛나던 시절

당신 너른 모래바다에

무수한 발자국 찍으며 뛰놀았던 걸

썰물 때 되어서야 알았네, 당신 있어서


이 생에 나는 달나라 공주였단 걸.

keyword
이전 01화[첫번째 詩절예보]눈이 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