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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시절예보 01화

[첫번째 詩절예보]눈이 오네

그 시절 좋아하던 노래의 기억: 10cm '눈이 오네'

by 은토끼

4월에는 벚꽃이 내린다.

12월에는 첫눈이 내린다.

하늘에서 희고 아름다운 무엇이 내릴 때 내 가슴은 그것의 낙하 속도에 맞춰 먹먹해진다.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 학기가 끝난 12월의 어느 겨울밤에도 나는 기숙사의 긴 직사각형 창 너머로 사라지는 것들을 보고 있었다. 졸업은 코끝으로 다가와 있었고, 그것은 철없이 무엇이든 해도 좋을 시절 역시 사라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텅 빈 기숙사에서 맞는 눈 오는 밤의 적막한 아름다움을 견디며 나는 깊은 바다 속에 엎드려 수압을 견디는 심해어가 된 기분이었다. 저 심해에는 죽은 플랑크톤의 잔해가 눈처럼 늘 내리고 있다고 한다. 그걸 summer snow라고 부른다고. 아름답고 부질없는 지식과 감상이 주는 자의식에 취해 나는 창밖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10cm의 ‘눈이 오네’를 반복해서 들었다. 그건 내가 처음으로 들은 10cm의 노래였다. 이 밴드가 ‘아메리카노’로 시작해 ‘사랑은 은하수 다방에서’, ‘안아줘요’ 등으로 연달아 히트를 친 지금에도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당시는 인디 음악이라는 게 막 수면으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그 흐름에 발맞춰 저예산으로 인디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를 찍어 올려 주는 사이트가 있었다. 10cm의 노래도 그 곳에서 처음 들었다. 버스에서, 카페에서, 어느 구멍가게 처마 밑에서 녹음된 노래에는 생활의 풍경과 소음이 그대로 섞여 있었다. 마치 영화 <Begin Again>의 한 장면처럼. 그것은 평범하여 더 아름답고 생경한 서정이었다. 그 겨울 내내 나의 컴퓨터 화면에 10cm의 뮤직비디오가 얼마나 자주 재생되었을까. 이제 그 사이트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지만 지금도 눈이 오면 나는 휴대폰을 뒤져 ‘눈이 오네’를 찾아 듣는다. 이어폰을 꽂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 슬프고 외로운 감정마저도 흘러 지나가는 게 아까워 어떻게든 꼭 붙들려 했던 스물 세 살의 내가 떠오른다. 이제 나는 기쁜 감정도 자연스럽게 지나가기를 바란다. 어떤 감정들은 붙들려 해도 희미해지고, 어떤 감정들은 지우려 해도 끈덕지게 남아 내 풍경의 일부가 되는 것을 이제 조금은 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시를 동경했던 나는 심해어와 눈의 이미지로 시를 만들어 보려 애썼었다. 결국 조금이라도 흡족한 녀석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눈이 오네'의 가사처럼 아름다운 시를 한 편 쓰고 싶은 마음은 늘 남아 있었나 보다. 지난겨울에 쓴 일기장에도 눈에 대한 시가 한 편 있기에 옮겨 본다.





올해는 하느님도 참 힘들었나 보다

내내 듣기만 하느라 지쳐 얼어붙은 귓잔등마다

하얗게 새어 버린 말들이

가득 내리는 걸 보면


눈이 내린다

나붓나붓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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