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보았던 영화의 기억: 이 영화 왜 보자고 한 거야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남자가 여자에게 묻는다
이거 왜 보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너 알겠어? 이해했어?
대답을 찾지 못했지만 대답하기 위해 횡설수설하는 여자 대신에
내가 말해주고 싶다
그건 별자리 같은 거야
말하자면 별자리를 만들기 위한 거지
별들이 무슨 의도가 있어 그 자리에 있겠어
별들의 위치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
그래서 별자리는
알아내는 게 아니야 애초에 알아낼 것이 없으니까
그냥 바라본 내가 만드는 거야 상상하는 거야
그러니 별들의 관계를 이해하려고 하지 마
그들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어
패터슨이 패터슨에 사는 것처럼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이 카를로스 윌리엄 카를로스인 것처럼
매일 쌍둥이를 만나는 것처럼
월요일이 가고 월요일이 오는 것처럼
흩어져 있는 빛들의 공백을
흩어져 있는 영상들의 사이를
흩어져 있는 단어들의 빈 숨을
그냥 이어보는 거야 내 마음대로 왜냐하면 그것들은 어차피 이해받기 위해 그곳에 있는 게 아니니까
그냥 거기 있는 거야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여기 있듯이
네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여기 있듯이
그래서 이을 수 있는 거야
신이 우리를 여기에 두었기 때문이 아니기에
설령 신이 둔 수라 해도 그 수에는 아무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상상할 수 있는 거야
알 수 없는 영화를
알 수 없어서 보고 싶어질 수도 있는 거야
1.
혼자 영화를 보러 갈 때 어떤 영화관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꽤 중요한 문제이다. 명동 씨네라이브러리는 나 같은 ‘혼영러’들에게 매우 반가운 공간이다. 우선 도서관이 있다. 그 날의 영화표가 있으면 입장할 수 있는 이 작은 도서관은 영화관의 계단형 좌석 구조를 낭만적으로 재해석해 놓은 데다 구비되어 있는 책들도 꽤 많아서(물론 모두 영화 관련 서적이지만) 영화를 기다리는 동안의 시간을 때로는 영화를 보는 시간보다 더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주말에 명동 거리가 인파로 미어터질 때도 대개 이 영화관은 특유의 고요한 분위기를 잃지 않으며 커플들 사이에서 나만 혼자인 기현상도 피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작품성은 있지만 흥행성은 없는 듣보잡의 영화들이 주로 개봉되기 때문이리라 추측한다. 이런 듣보잡 영화들에 대한 지적 허영이 있는 나에게는 이마저도 감사한 일이다.
그 날 내가 명동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선택한 영화는 <패터슨>이었다. 미국 뉴저지 주 소도시인 패터슨에 사는 버스기사 패터슨의 일상을 담은 이 영화는 극히 단조롭다. 패터슨은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노선을 따라 버스를 몰고 틈틈이 시를 쓴다. 엉뚱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늘 어디에선가는 쌍둥이를 마주친다거나, 시 쓰기를 좋아하는 꼬마 소녀와 느닷없이 대화를 주고받게 된다거나, 시를 쓰던 노트가 훼손되어 좌절한 패터슨의 앞에 낯선 일본인이 나타나 노트 한 권을 주고 홀연히 사라지거나 하는 등의 일들. 그러나 이러한 일들조차 아무런 논리나 개연성 없이 일상 속에 그냥 점처럼 박혀 있어 다 보고 나면 그래서 대체 이건 무슨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건가 하는 절규가 소리 없이 목구멍에서 흘러나오게 된다.
영화를 보고 난 후 한 커플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남자의 표정은 한 마디로 ‘삐이이익-’했다. 깊은 짜증과 혼돈을 꾹꾹 눌러 담은 남자의 얼굴을 여자는 신경 안 쓰는 척하며 엄청나게 신경 쓰고 있었다. 남자가 결국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영화 왜 보자고 한 거야?” 여자는 뭐라 횡설수설 답했지만 이미 머리 위에는 보이지 않는 백기가 꽂혀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여자에 대한 변호를 해주었다. 그리고 이 커플이 과연 언제쯤 헤어지게 될까를 가늠해 보았다. 물론 헤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2.
스물한 살 겨울이었다. 그 때 나는 엘리베이터 속 그 여자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적이 드물다 못해 뚝 끊긴 어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이제 영화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낙원상가 근처에 위치해 있었는데 상영관이 두 개뿐이었으며 관객도 우리 둘 뿐이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우리가 본 영화는 <입술은 안돼요>라는 프랑스 뮤지컬 영화였다. 영화 <아멜리아>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랑스러울 수 있지 하는 충격을 안겨 주었던 오드리 토트가 주연이라는 점에 혹하여서 내가 보자고 우긴 영화였다. 남자친구는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내내 졸다가 짜증을 참다가를 반복했고, 나는 남자친구의 눈치를 보다가 애써 영화의 장점을 찾기를 반복했다. 영화는 공장에서 가장 저렴한 원료로 만들어낸 사탕처럼 달달하기만 했고 재미도 감동도 없었다. 차라리 야한 장면이라도 하나 나오기를 바랐지만 심지어 제목과 달리, 혹은 제목처럼 백퍼센트 건전하기까지 했다.
굉장히 추운 날이었다. 나보다도 한 살 더 어렸던 남자친구는 모름지기 멋진 남자란 한겨울에도 두툼하지만 못생긴 점퍼 따위는 입지 않아야 한다는 신조를 지니고 있었고, 나 역시 그 때는 영하의 날씨에도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을 포기하지 못하는 여자애였다. 우리는 동해 바닷가 마을에 걸려 있는 동태들처럼 꽁꽁 언 상태가 되어 영화관에서 역까지 걸어갔다. 한참의 침묵 후 남자친구가 말했다. “이 영화 왜 보자고 한 거야?” 미안하다는 말 이외에는 다른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후 한 달도 못 되어 헤어졌다. 내가 그 애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아마 헤어질 때도 내 표정은 영화관에서 그 애의 눈치를 살피던, 딱 그 표정이었을 것이다. 부디 <패터슨>을 보고 나온 커플은 더 오래오래 가길.
그 때 나는 우리가 헤어지게 된 이유를 찾고자 무척 고군분투했다. ‘우리가 왜 헤어진 거지?’라는 질문이 한동안 쉬지 않고 내 머릿속에서 반복해서 굴러갔다. 나는 내 삶이 개연성과 논리성을 완벽하게 갖춘 한 편의 시나리오이길 바랐다. 사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시나리오가 잘 짜인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수많은 복선들이 결말에 이르러 마침내 의미를 획득하고 타당한 결과를 이끌어낼 때 주는 어마어마한 쾌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소중했던 인연과 감정들이 내 삶의 결정적 복선이 아니라 별다른 의미도 인과 관계도 갖지 못한 사건들일 뿐이었으며, 나 자신조차 내 지난날들이 만들어낸 논리적 결과물이기보다는 우연의 산물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실은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다. 내 안의 별과 별을 마음대로 이어 지도를 만들고 이야기를 덧붙이고는 그게 진짜 나라고 믿어버린다. 그 믿음으로 나를 정의하고 구속하는 오류는 마음의 밑바닥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매혹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헤어 나오기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패터슨>이 좋았다. 일관되지 않는 서사, 제멋대로 그저 나열되어 있을 뿐인 사건들 속에서 패터슨은 시를 쓴다. 굉장한 논리와 주제를 지닌 시가 아니라 그냥 한 순간 한 순간을 포착하여 담담히 옮겨낸 시를 쓴다. 시에는 미사여구도 없다.
지금도 어느 영화관에서는 이런 질문이 오고 가고 있을 것이다. “너 이 영화 왜 보자고 한 거야?” 연인이 물어봤을 수도 있고, 친구가 물어봤을 수도 있고, 혹은 혼자 자신에게 물어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도 알 것이다. 수많은 질문들 중에서도 특히 “왜?”로 시작하는 질문 대부분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