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좋아하고, 좋아하여 미워했던 시절의 기억: 사랑은 유리 같은 것
마침내 뚝 꺾어 버린
저 커다란 노란 얼굴
여름의 마지막 답장일 것이다
우리의 우편함과 우편함 사이에 촘촘히 박아 둔 시간의 씨앗들이 컹컹-
녹음처럼 날마다 짙어지던 불면증의 날들이 낑낑-
짖는다
어느 날 너는 긴다리를 탈탈 털고는
성큼 가을 하늘로 뛰어 올라갔고
구름은 냄새 없이 말갛다
하지만 알고 있니
너의 꼬리는 아직 여기
마르지 않는 빨래들과 함께 널려 있다
장마의 느낌표 속에 널브러져 있다
야 이 개새끼야-
꼬리를 걷어차면
물음표로 휘겠지
가련하게도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위해 울 자격이 없다
그런 건 착한 사람들의 권리다
언젠가 네가
한기에 젖은 얼굴로
나 사실 너 생각하며 울었어, 라고 고백한다면
나는 기필코 너를 물어 버릴 것이다
나의 첫사랑은 누구일까.
초등학교 때 좋아했던 반장일까. 삼 년이나 좋아했고 고백을 담은 엽서도 보냈던 그 아이. 물론 부끄러워 엽서에 내 이름은 적지 못했지만. 아니면 중학교 2학년 때 글쓰기 사이트에서 친해진 오빠일까. 그 오빠와 채팅을 하기 위해 일주일에 두 번씩 몰래 침대에서 빠져나와 새벽 한 시에 컴퓨터를 켰었다. 아니다. 얼굴 한 번 직접 본 일 없이 멀어졌는데 첫사랑이라니. 대학생이 되어 처음 사귄 남자친구가 역시 첫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일주일 만에 헤어지기는 했지만. 그럼 그 후 꽤 오래 혼자 짝사랑했던 선배가 첫사랑일까. 나는 그 때 이 사람이 늙어서 할아버지가 된 모습마저 사랑스러울 것 같았다. 지금은 아저씨가 되었을 모습마저 보고 싶지 않건만.
첫사랑이라는 말은 참 어여쁘다. 명확한 대상도 없이 어여뻐서 때로는 어디에나 그 이름을 붙여 주고 싶고 때로는 어디에도 붙여 주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내 첫사랑의 서사는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집에 가깝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첫사랑의 서사들을 헤아려 보고 있노라면 나는 참 쉽게 애틋해지는 사람임을 실감한다.
그러나 언뜻 따스하고 물큰한 느낌을 주는 이 감정은 사실 날카로운 단면을 숨기고 있어 깨어지는 순간 마음을 깊이 베이고 만다. 어쩌면 첫사랑보다 더 깊이 사람의 마음에 남는 것은 첫이별이 아닐까 싶다. 연습 없이 다가오는 첫이별 앞에 나는 꽤 깊이 베였던 것 같다. 길을 걷다가도 울고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도 울었다. 우는 내 얼굴이 창피해 괜히 옆 칸으로 옮겨 타고는 그게 서러워 또 울기도 했다.
사랑은 유리 같은 것
아름답게 빛나지만 깨어지기 쉽다는 걸
무려 1988년에 발표된 노래 <사랑은 유리 같은 것>의 가사에 담긴 이별의 정서는 언제나 유효해서 나는 한동안 깨진 유리조각을 밟은 사람처럼 지냈다. 유리조각은 작고 투명해 깨끗이 쓸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도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불쑥 발바닥 사이로 파고들고는 했다.
어느 것을 딱 첫사랑으로 명명하기 어렵듯이 어느 것을 첫이별이라 명명하기도 어렵다. 사랑의 모습이 제각각이듯 이별의 모습도 제각각이라 매번 처음처럼 생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이별의 태도는 늘 서툴렀다. 좀 더 안아주고 보냈어야 할 사람을 안아주지 못했고, 좀 더 빨리 돌아서야 했을 사람을 오래 혼자 바라보았다.
잘 지내.
이 판에 박힌 말을 몇 번이나 서로에게 건넸을까. 잘 지내라니. 적어도 한 동안은 불가능할 그 당부는 때로는 간절한 바람이었으나 대개는 자격 없는 말이었다. 욕 한 마디쯤 귀에 박아주고 떠나는 편이 솔직한 결말이었겠지만 나는 한 번도 솔직하지 못했다. 너와 내가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끝내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상처에 소금 대신 설탕을 덮어 재웠다.
그러나 사랑을 하면서 우리는 누구나 한번쯤은 쌍년이 되고 개새끼가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쌍년이었고 개새끼였다. 물론 내가 이 문장을 입 밖으로 낼 일은 없을 것이다. <건축학개론>에서 한가인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어색하게 내뱉은 욕보다도 더 어색하게 들릴 게 뻔하니까. 욕을 찰지게 하는 재주도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다. 언젠가 내가 누군가의 면전에 욕을 하는 날이 온다면 아마 그런 내 모습에 내가 먼저 놀라 울음을 터트릴 게 뻔하다. 그래도 한 번쯤은 써보고 싶었다. 야 이 개새끼야- 라고 외치는 시를. 너를 그리워했다고 말하지 않고 물어버리겠다고 말하는 시를.
내 첫사랑들과 첫이별들에게 바치는 아주 못된 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