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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시절예보 08화

[여덟번째 詩절예보]서랍을 닫는 일

아름다웠던 시절을 잊는 법: 멜로가 체질

by 은토끼


언제나 잔비가 내리는 서랍

시간의 곰팡이가 잠드는 서랍


그 바닷가에 서랍을 하나 두고 왔지


어느 오랜 후에

파도가 손잡이를 당기면

모래에 새겨둔 마지막 글자들로 흩어질 서랍


이따금

서랍의 안부가 그리운 날도 있겠지만

나는 그 바닷가에 모두 두고 왔지


너무 아름다웠으니까


그 모든 풍경을 나의 미래로 갖고 가기에는

너무 아름다워

나는 또 너무 많은 마음을 찢어버릴 테니까


헤어진다는 건

구체를 추상으로 바꾸는 일


오후 다섯 시의 햇살에 비스듬히 빛나던 포말과

붉은 목덜미에 머리카락이 나부끼던 방향과

발등을 나란히 덮던 물의 중량


그 선명한 마음의 풍경에

너의 얼굴에

추억,

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두고

서랍을 닫는 일


그 해 여름 아주 먼 이름 없는 바닷가에 서랍을 하나 두고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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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종영한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는 은정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은정은 남자친구와 몇 년 전 사별하였고, 지금은 두 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 두 친구 역시 이별한 상태이다. 한 명은 대학생 때부터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해왔던 남자친구와 마침내 완전히 헤어졌고, 다른 한 명은 죽자고 그녀를 쫓아다녀 결혼한 남편이 변심하여 헤어졌다. 사실 모든 이별은 사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 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기는 하나 헤어진 연인의 세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점에서는.


따지고 보면 은정의 이별도 친구들의 이별보다 딱히 더 특별할 건 없다. 그러나 헤어진 남자친구의 환영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그 셋 중에 은정뿐이다. 왜냐하면 은정의 연인은 더 이상 설레지 않거나, 설렘보다 미움이 더 커졌거나 해서가 아니라 아직 그 마음이 뜨겁고 아름다울 때 그녀의 인생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방식으로 아주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는데도 그녀의 마음에는 아직 완벽하게 그 사랑이 남아 있다. 그녀는 완벽하게 사라진 사람을 완벽하게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세상을 왜곡한다. 세상을 왜곡하는 갖가지 방식 중에서도 참 애틋하고 무서운 왜곡이, 바로 사랑의 왜곡일 것이다.


그러하다. 사랑했던 대상을 잘 잊는 일은 그렇게 어렵다. 이 드라마의 배경에 깔리는 노래 가사처럼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지게 하고, 심각하게는 없는 사람의 환영까지 보게 한다. 그래서 소중하다. 잘 잊는 일은 참 소중하다. 어느 날 내가 사랑했던 대상들을 예전보다는 좀 더 잘 잊게 되었다고 느꼈을 때 나는 내가 조금은 어른이 되었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한 도시에서 오래도록 살아가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일이 있는데 헤어진 연인과 갔던 곳을 다시 가게 되는 일이다. 안타깝게도 이별의 파편은 대개 먼 이름 없는 바닷가가 아니라 내가 사는 곳 가까운 곳일수록 더 선명하게 흩뿌려져 있다. 그 날도 그러했다. 함께 걸었던 길을 어쩌다 보니 혼자서 걷고 있었는데, 그래서 아프기는 한데 찌르듯이 아프지 않고 둔하게 아팠다. 같이 걸었던 기억은 있는데 그 날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걸었는지 앞을 보고 걸었는지, 햇빛이 정수리를 비추었는지, 어디에서 웃었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 이야기를 할 때 억양은 어떠했는지 아스라했다. 그래서 슬펐고 또 고마웠다. 기억의 모서리가 둥글게 깎여나가는 것, 누군가는 추억의 미화라고 하는 것, 그러나 그 미화 혹은 망각의 작업이 없다면 우리는 여름을 기억하느라 가을을 살 수 없을 것이고, 지난 숨을 기억하기 위해 다음 숨을 쉴 수 없을 것이다. 이 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느 아름다운 바닷가가 아닌 평범한 풍경의 길거리에서.


뒤늦게 빠져 보기 시작해 아직 <멜로가 체질>의 결말을 확인하지 못했다. 아마 은정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될 것도 같다. 그러나 어떤 결말이 나든 그녀가 온전히 그 새로운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치유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을 수 있지만, 상처는 사람으로 지울 수 없다. 오히려 조금씩 모래사장을 쓸어 나가는 파도 같은 매일의 시간과 그 시간 속의 망각이, 무엇보다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을 망각할 자신 안의 용기가 상처를 치유해줄 것이라 생각해본다. 은정의 기억이 마음을 찢어버리지 않을 만큼 무뎌지기를, 부디 마음의 서랍을 잘 닫기를 바라며, 간만에 허구의 인물을 간절히 응원하는 마음을 가져보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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