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시절예보 09화

[아홉번째 詩절예보]나의 사랑하는 습관들에게

한 시절 누군가의 습관을 사랑했던 혹은 미워했던 기억

by 은토끼

안녕. 나의 사랑하는 습관들아.


습관을 사랑하는 일은 시간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 습관이 들기까지의 시간을 사랑하는 일이고, 그러한 습관이 있음을 눈치 채게 되기까지의 시간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너의 눈을, 코를, 귀를 사랑해’라는 고백보다 ‘네가 눈을 이런 방식으로 깜빡이고, 코를 저런 방식으로 찡그리고, 귀를 그런 방식으로 쓸어 넘기는 그 습관들을 사랑해’라는 고백에 더 마음이 안온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말속에는 내가 오랜 시간 동안 네가 눈과 코와 귀를 움직이는 방식들을 지켜봐왔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습관을 사랑하는 일은 어렵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오래도록 고민하다가 깨달았다. 내가 사랑했던 이들을 떠올렸을 때 그들이 어떠한 습관을 지녔었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사랑에 있어 나는 자주 성급한 자의 위치에 서 있었나보다.


기억의 구멍을 기록으로 메워보려고 메모 어플을 뒤적여 보았다. 오래된 메모 하나를 발견했다. ‘고쳐야 할 습관들’이라는 제목으로 기록된 메모였다.


‘이렇게 해주면 좋겠어’라고 말하지 않고 ‘이렇게 해 줄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

일어났을 때, 밥 먹을 때, 퇴근할 때, 잘 때 꼬박꼬박 연락하지 않는 것

이마를 찡그리며 눈을 위로 뜨고 바라보는 것


그건 당시에 만나던 사람이 내게 부탁했던 고쳐야 할 습관이었다. 의도를 명확히 전달하지 않고 의문형으로 에둘러 전하는 말버릇부터 많은 연인들이 부딪히게 되는 연락의 문제, 그리고 사소한 표정까지 우리가 기록으로 남긴 습관은 사랑했던 습관이 아니라 싫어했던 습관이었다. 내가 상대에게서 주목했던 습관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자주 서로의 사소한 습관을 고치려 했고, 당연히 자주 마음에 실금을 냈다. 어쩌면 이 글은 ‘나의 미워하는 습관들에게’라고 시작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끝도 없이 긴 글을 힘들이지 않고 완성할 수 있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래요. 당신은 이런 내 습관이 싫었겠죠. 이야기 할 때의 이런 습관, 바라볼 때의 이런 습관, 밥 먹을 때의 이런 습관, 불안할 때의 이런 습관, 들뜰 때의 이런 습관, 표정, 말투, 걸음걸이, 그리고 또…, 반대로 내가 싫어했던 당신의 습관의 목록들도 우리가 멀어졌던 시간들만큼이나 길겠죠, 라고. 그리고 그 글의 끝은 이렇게 맺어야할 것이다. 미안해.


‘사랑하는’으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미안해’로 끝맺는 것. 실은 이것이 수많은 사랑의 서사의 결말일 것이다. 그 지난 서사들에게 나는 뒤늦게 사과해본다. 미움과 사랑은 양면의 감정이라 사랑하지 않고는 미워할 수 없다. 미움의 영역에 두었던 습관들은 사랑의 영역에 둘 수도 있는 습관들이었다. 우리 언니에게는 느리게 씻고 화장하는 습관이 있어서 바쁜 아침에도 한 시간은 족히 허비하는데, 어느 날은 언니가 이 습관을 좀 고쳐야겠다고 자책하자 형부가 그랬단다. “그 속도가 네가 힘들지 않은 속도일 거야. 괜찮아.” 느리게 움직이는 모습을 답답하고 게으르다 보지 않고 에너지가 적은 사람이니까 빨리 못 움직이는구나 하고 헤아리는 마음, 느리고 부산하게 꼬물거리는 모습을 그래서 괜찮다고 귀엽게 봐 줄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이 미움의 시선 아래 둘 수 있는 습관을 사랑의 시선 아래로 데려온다.


그러니 이제는 안녕. 내 마음이 설익어 사랑하지 못했던, 혹은 한 때 사랑하고도 금세 잊어버렸던 습관들아. 아프지 않은 어느 마음자리에서 잘 지내자. 언젠가 그 마음자리가 제법 넓고 비옥해져 “나는 당신의 이러한 습관을 사랑해요”라는 말을 심을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그 때 다시 한 번 편지를 띄울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습관들에게, 라고.


이 시는 그 훗날에 띄워 보는 첫 번째 편지이다. 어느 날 쨍한 햇살 아래 서 있던 언니의 옆모습을 첫 구절을 보고 떠올렸으니 언니에게 띄우는 편지라고 해도 좋겠다. 어쩌면 모든 아름다운 마음에게 띄우는 시이기도 하고. 나는 언제나 감히 내 시가 아름답기를 바라지만, 삶은 조금 더 아름답기를 바란다.







당신의 귓바퀴는 유난히 얇아

나뭇잎의 뒷면처럼 햇빛 아래 반쯤 투명해지고는 했다

당신이 머리를 쓸어 올릴 때마다 드러나는

그 여린 귓바퀴를

나는 사랑했다


그러자니 자주 머리를 쓸어 올리는

당신의 부산한 몸짓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부산한 몸짓들 속에서도 헐겁게 흘러가는

당신의 시간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당신의 시간 속에 살고 싶었다

잠시 맺혔다 떨어지는 가을이슬로라도

keyword
이전 08화[여덟번째 詩절예보]서랍을 닫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