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림은 PainterEUN Oct 24. 2021

미련 없이 가벼운 마음

굳이


 아침에 잠을 깨면 제일 먼저 더듬더듬 휴대전화를 찾습니다. 채 잠이 깨지 않은 눈을 비비며 시간을 확인합니다.

잠귀가 밝은 편이라 일정 시간은 방해금지 모드로 해 놓기에, 자는 동안 온 메일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늘게 눈으로 침대 스탠드를 켭니다.

휴대폰 잠금 화면을 풀어보니 전화가 와있습니다. 요즘은 워낙 스팸 전화가 많아서 무심코 부재중 통화에 바로 연락하기가 꺼려집니다. 용무가 있는 전화라면 메일이나 문자를 남길 것이니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다가, 혹여 업무전화일지도 모르니 통화버튼을 누르려 번호를 눈으로 훑었습니다.

왜인지 알 듯 모를 듯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의 전화번호.

긴가민가했지만 확신하기엔 너무 희미한 느낌. 저장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착각한 것인지모릅니다.


 어릴 때는 저를 찾는 전화, 오랜만에 걸려오는 지인들의 전화가 반가웠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오랜 연락이 없다 오는 지인들의 연락은,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덜컥 겁이 날 때가 있습니다.

좋은 일보다는 좋지 않은 일로 연락 오는 빈도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알긴 하지만 친분이 두텁지 않은 사람의 연락일수록 머뭇거리게 되는 건, 가벼운 안부가 아닐 때가 많아서입니다.


뚜루르르르 뚜루르르르 신호음이 한참을 가도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마지막 신호음까지 끊기고 전화기를 내려놓을 찰나 문자가 왔습니다.


 " 잘 지내지? 블루투스 오류로 전화가 걸렸어."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걸 봐서 아는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길을 가다 예전 친구가 반갑게 인사했는데, 나는 그 친구가 기억나지 않을 때의 미안한 마음이 이런 걸까요····

실수로 한 연락이었겠지만, 연락한 사람의 마음이 서운해지지 않도록 답장을 보내야겠다 싶었습니다.

누군지 알아야 잘 대답할 수 있을 테니, 문명의 발달을 이용해 메신저로 번호를 등록하여 보니

'아···· '

휴대전화에 왜 상대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제 손에 상대의 전화기가 있다면 연락처 목록에서 제 전화번호를 지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나마 위안으로 삼자면, 신변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겨 연락한 건 아니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굳이 연락을 무시해 서로의 마음에 찌꺼기가 남지 않도록 유연하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나는 잘 지내. 좋지 않은 일이 아니라 다행이다. 요즘은 건강이 제일 중요한데 건강하게 잘 지내"라 보내고

살며시 연락처를 차단하고 메신저에 등록한 연락처와 받은 문자를 삭제했습니다.


 누군가의 사소한 연락에 많은 감정을 소모하고 널뛰던 때가 있었는데,

몇 해 전부터는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상처 주고 싶어 하는 것 역시 마음 한편을 쓰는 일이라

되도록 저는 제게 사과를 건네는 이들의 말을 들어주는 편입니다.

"그랬구나"라고 당시의 상대 마음을 이해해 주는 말을 건네지만,

그것이 지금부터 다시 연락을 이어나가도 괜찮다는 마음은 아니기에

연락을 계속 이어나가고자 하는 이들에겐 거절의 의사를 표명하고 그 이후의 연락은 거절합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감정을 자동 반사적으로 상기시키는 사람과 마주하며 깎여갈 제 마음을 외면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내 남은 시간을 굳이 내 감정을 구기고 깎아내는 것에 할애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럼에도 오는 연락을 왜 받아주거나 답장을 해주냐 묻는다면

그저 각자의 삶에 충실할 수 있도록

제 마음도 상대의 마음도 미련 없이 가볍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입니다.


서로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서입니다.



 때론 시간이 지나면 큰 것들이 작게 변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시간이 유의미하게 흐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저 지나온 것이 아니라 당시의 힘든 시간을 잘 견디고 버텨  

이렇게 우리는 유려하게 가벼워지고 평정을 찾아가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PainterEUN

이전 13화 일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