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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은 PainterEUN Oct 30. 2022

이렇게 가까이 행복을 두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게 중요한 사람

Photo by Alexander Grey on Unsplash


달칵, 달칵, 달칵, 타닥, 삑.

침대 머리맡 주위를 둘러싼 조명을 하나씩 켭니다. 침대에 몸을 뉘고 방 조명을 리모컨으로 끄면 은은한 노란빛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세계 곳곳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지구본 조명, 위로의 메시지와 이름을 각인한 아크릴 조명, 침대와 커튼을 감싼 아기자기한 앵두 전구, 당장이라도 그림 속 인물이 튀어나와 함께 춤을 추자고 할 것 같은 책 모양의 조명, 각기 다른 형태처럼 저마다 다른 조도와 색온도의 빛을 발합니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온화해진 방 안을 둘러보니 마음이 금세 충전이 됩니다.

'아 내가 행복을 참 가까이 두었구나.' 나를 마구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반짝이는 작은 불빛, 부드러운 촉감, 손길이 닿을 때 잘그락거리며 부딪히는 소리, 타각 타각 느껴지는 묵직함, 위트 있는 디자인, 아기자기한 형태, 섬세한 색 조화, 사용할 때마다 눈길이 닿는 작은 소품들 하나하나 삶에 필수적이진 않지만 바라볼 때마다 나를 충족시키는 것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공간이 주는 힘을 받는 사람.
예쁜 소품을 사랑하는 사람.
쓸모라곤 보이는 게 다일뿐인 것에 스르르 마음이 녹아 발길이 머무는 사람.
생물, 무생물을 뛰어넘어 어쩌면 눈에 닿는 모든 게 중요한 사람.
그리하여 색상, 디자인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힘겨운 사람.
그래서 테이블 하나 고르는데도 재질과 무늬, 색감, 디자인을 심히 고심하는 사람.
들이는 물건만큼 곁에 오래 머무는 것도 없으니 발품을 팔고 시간을 들입니다.
그렇게 곁에 머물게 되는 것들은 수명이 다할 때까지 제게 잦은 행복을 선사합니다.


내가 나를 알아갈수록 좋아하는 것들이 더욱 선명해져서 좋아지는 요즘입니다.




저를 몰랐을 때는 버려지는 박스 용기가 아까워 재사용을 많이 했습니다. 물건을 정리하는데 박스만큼 요긴한 게 없거든요. 선물 세트 상자는 그 안에 A4 용지를 수납한 후 의자 아래 발판으로 사용하고 유산균 통은 연필꽂이로, 포장 빵 상자는 여러 화장품 용기를 정리해 담는 용으로, 스킨이나 로션 같은 개별 화장품 포장 케이스는 사선으로 커팅해 연고를 담거나 귀이개나 손톱깎이 같은 작은 용품을 담았습니다. 사용하는 것보다 좀 더 깔끔한 상자가 손에 들어오거나 더러워져 새 용기로 교체할 일이 생겨도 자원을 재활용했던 거라 마음이 크게 무겁진 않았습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걸 사용하는 저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말이 있지만, 저는 눈에 보이는 게 너무 중요한 사람이었던 거죠.

제 눈에 보이는 게 중요한 사람이요.


하루는 아무리 일에 집중하려고 해도 뭔가 답답한 기분에 책상에 앉지 못했습니다. 일이 잘 안 되어서 그랬는지 책상이 너무 무질서해서 시선이 자꾸 흩어졌습니다. 크게 어질러진 것이 없는데도 말이죠.

일이 잘 안 되는 핑계를 대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할 일이 중요하고 급할수록 책상 정리를 하게 되는 법. 저를 잘 운용해 나가야 위해 괜한 핑계일지라도 책상 정리를 바지런히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책상 정리를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자꾸 3열 종대로 나란히 자리 차지하고 있는 유산균 통으로 시선이 쏠렸습니다. 여러 해 동안 연필꽂이로 충분한 기능은 발휘했지만, 미적으로는 늘 탐탁지 않았습니다. 유산균 용기에 적힌 글자가 눈에 거슬려 최대한 글자가 없는 쪽으로 돌려놓거나 두어 개는 선물로 들어온 포장지로 새 옷을 입히기도 했으 그다지 어울리지도 않는 색감과 패턴의 다양함이 안 그래도 복잡한 책상이 더 어수선하게 느껴졌습니다.

버리지 않고선 해결되지 않겠다 싶어서 연필꽂이를 사야겠다 마음먹었습니다.


유산균 통이 많이 나와서 펜, 연필, 색연필, 가위, 칼 같은 것들을 따로 구분해서 사용했었는데 꽤 편리했기에 그 점을 참작해 칸이 여러 개 있어 구분해서 담을 수 있는 것으로, 하지만 지금과는 다르게 공간 효율은 높고, 되도록 시선이 분산되지 않도록 심플한 것을 고르기 위해 다량의 연필꽂이를 검색했습니다.
어떻게 되었냐고요?
이게 뭐라고 여태 구매하지 않았던지 전 연필꽂이 하나에 이렇게 삶이 달라질 줄 알았다면 진작 하나 살 걸 그랬습니다.

필요에 따라 촤르르륵 연필꽂이를 돌릴 때마다 만족감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갑니다.

굳이 일어서지 않고도 손에 닿는 편의함, 한결 정돈된 시야, 넓어진 공간.

촤르르륵 소리에 제 몸도 마음도 가볍게 회전하듯 춤추는 것 같습니다.


글이 써지지 않는 핑계가 하나 사라진 셈이니 이제 써지지 않는 원고 핑계를 어디에 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뭐 어떤가요. 제 마음에 평온이 들었으니 되었습니다.


시야가 닿을 때마다 제 마음을 언짢게 했던 물품이나 박스들은 예쁜 수납장을 구매해 넣어두었습니다. 그 안에서 박스들은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물건을 분리하고 있습니다. 물건 정리도 잘되고 겉으로 보이지도 않으니 편안하고 좋습니다.


제 삶에 불편함을 제거해 나간 마음의 공간엔 여유가 찾아들고 있습니다.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작은 것 하나에도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느끼고 나니

삶의 다른 부분도 신경 쓰이는 작은 것 하나부터 바꿔나가면 저는 좀 더 행복해질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은 어떤 불편함을 제거하고 어떤 행복감을 느끼게 될지 벌써 기대됩니다.



Painter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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