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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 서점원 Aug 31. 2022

컵은 언제든 깨져도 된다

2022

읽고 있던 시집을 휘둘러 날아가던 파리를 때려잡았다. ‘시간의 이불은 꽃과 나비처럼 아름다운 거여서 생애의 추억은 다 따라와 흩날렸다’ (*박서영,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는 셋>) 라는 구절을 읽으며 매운 코를 들이키던 순간이다.


시집에 한 대 얻어맞은 파리는 바닥에 철퍽, 잉잉 울며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다가 내가 휴지를 가지러 간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오전엔 컵 하나가 깨졌다. 다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조심스레 조각을 쓸어 모아 빈 박스에 담았다. 책을 떨어트려 모서리가 찌그러지는 건 용납할 수 없지만, 컵은 언제든 깨져도 된다. 깨진 컵 조각은 밭으로 가져가 장례를 치를 것이다.


책이 팔렸을 때의 기쁨은 돈을 벌었다는 기쁨보다, ‘책을 사서 읽는 사람은 실존한다. 여전히.’ 라는 명제에 대한 증명이라 기쁘다. 주말과 휴일에는 시집을 읽고 파리를 때리고 깨진 컵의 묫자리를 생각하며 누군가가 나타나 증명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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