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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Sep 11. 2023

물 위의 조각배 신세

말짱이 진상으로 돌변한 사연

   관리사무소는 항상 시끌시끌하고 왁자지껄한 게 정상일까. 반대로 마치 도서관처럼 조용하다면 뭔가 잘 못 돌아가는 것일까. 지금 내가 일하는 곳은 후자에 속한다. 불현듯 사무실이 너무 조용하다는 느낌이 들 때면, 왠지 기분이 이상하기는 하다. 내가 과연 일을 잘하고 있는 것인지, 혹시 안일한 구석은 없는지 불현듯 돌아보게 된다. 현안을 비롯한 과제들 중 놓치는 건 없는지 다시금 점검을 하고, 일정계획을 재정비해본다. 그전에 일했던 곳은 반대로 전자에 가까웠다.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직전의 마을은 규모가 제법 컸지만, 날이면 날마다 사분오열된 주민들끼리 서로 다투고 싸우느라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주로 그런 이유로 소란스럽고 불안하였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보람이 없었다. 그 동네보다 세대수가 삼분의 일 정도에 불과한 이 마을은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할 정도로 평온하다. 너무나 대조적이다. 용광로에서 달궈진 듯 야릇한 기분을 느끼며 콧노래가 나올 정도였다. 일터역시 궁합이 잘 맞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운이 따라야 가능하다는 것을. 소장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말을 하였다.


   우리 사무실은 비교적 조용하고 차분하다. 직원들은 매일 아침 5분 툴박스 미팅(Tool Box Meeting)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어제를 점검하고 오늘을 계획하는 짤막한 시간이다. 이제 갓 50을 넘긴 아줌마 경리 윤 주임의 역할이 크다.  똑 부러지게 자기 일을 면서도 소장의 보좌역까지 척척 해주니 고맙다. 내가 인정하는 A급 실력자다.


   내가 윤 주임을 우리 사무실의 리베로(libero)라고 치켜세운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민원대장 관리를 너무나 잘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미결사항이 처리되었는지 수시로 점검하고 기록하는 일이다. 특유의 싹싹한 성격 덕에 다른 직원들의 반응도 부드럽고 좋은 편이다. 내가 당초 그 일을 맡기기 전에는 약간의 염려를 했었다. 보통 경리는 자기 할 일만 하려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소장이 할 일이라며 거부하지나 않을지, 그것도 기전직 남자들을 상대하는 일인데 과연 잘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다. 지나고 보니 모두가 기우였다.^^


   내년이면 무료 지하철 카드를 받게 되는 김 과장도 개성 있고 경험 많은 기술자다. 시체말로 요즘 들어 특히 귀하신 몸이 된 전기과장이다. 우리 단지는 500세대 이하로 규모가 작아 기전과장이라고 부른다. 기계와 전기를 아우르는 역할을 하라는 주문이다. 휘하의 기전주임과 기전반장다독거리며 시설과 기술분야의 잡다한 일들을  챙긴다. 온순하면서도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다. 그 점이 나와 많이 았다. 자연히 그를 자주 찾고 챙기게 되었다. "소장님이 김 과장님을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경리주임이 김 과장에게 하는 말을 본의 아니게 들은 적도 있었다.^^


   소수의 인원이지만, 각자 정예가 되어 맡은 역할을  커버하고 다. 경리주임과 기전과장이 대들보 역할을 하는 두 축이다. 점검차 내가 직접 현장을 자주 가보는 편이기도 하지만, 1차 방어선이 이렇게 탄탄하게 구축된 것이 나름대로 뿌듯하였다. 직원들은 느끼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상호 협조적이고 자발적으로 나서도록 내가 세심하게 신경을 쓴 결과여서 더욱 그렇다.


   그런데, 조용한 우리 단지에 마침내 진상이 한 사람 등장하였다. 한 달에 두세 번씩 관리사무소에 자주 들르던 경로당 총무가 얼마 전부터 발길을 뚝 끊고 더 이상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만큼 우호적인 관계 속에 자주 만났던 사이여서 심상치 않았다. 되짚어 보니 달포쯤 전, 민원 문제로 나와 잠깐 언쟁을 한 다음부터다. 70대 초반으로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다. 얼토당토않게 민원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다른 일들까지 둘러 붙이며 나에게 터무니없는 말들을 퍼부었다. 자존심이 많이 상한 표정이었다. 그러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나도 당혹스러웠다. 뭔가 꼬투리를 잡아보려는 속셈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태도로 공세를 취하였다. 처음에는 그분이 순순히 받아들이리라 가볍게 생각했었다. 관계가 좋았으니까. 하지만, 내가 너무 순진했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얼마 , 기전반장을 한 사람 충원한 데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입주자대표회의에 뒤늦게 민원을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앞서 경로당 총무가 나에게 들먹이며 협박하듯 문제 삼았던 바로 그 일이었다. 그가 날이면 날마다 그 사람들과 노인정에 같이 모여 얘기를 나누는 사이라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제법 손재주가 있어서 가끔은 우리 직원들이 작업하는 현장에 와서 곧잘 도와준 일도 있었다. 그랬던 사람이 지금 와서는 직원들 일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타박을 한다는 소문도 들렸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건대, 민원인들의 배후에 바로 그 사람이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이제 와서 자신은 뒤로 빠지고 다른 사람들을 동원해 모종의 모의를 도모하다니! 비겁하고 유치했다.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싶어 실망스러웠다.


   그때부터 관리동 1층에 있는 경로당 창문이 뭔가 염탐하는 구멍처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안에 앉아 창문 너머로 나와 직원들을 감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불쾌한 생각이 들어 나는 의식적으로 그쪽 방향을 피해 다녔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생각도 했지만, 내 마음도 많이 상해서 가급적 그들 눈에 띄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나에게 그렇게 진상이 되었다. 그동안 좋았던 관계를 생각하면, 그것은 분명히 그가 돌변한 사건이다. 사실 부임한 지 1년 반이 지나도록 진상이라 할 만한 사람을 보지 못했기에 속으로만 이게 웬일일까 했다. 뒤로는 열심히 호박씨를 깔지언정 악다구니로 나서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긴장의 고삐를 놓지 말라며 떨어뜨린 한 방울의 양념으로 생각하기로 하였다.


   그 사람은 지금도 무슨 꿍꿍이에 골몰하고 있는지 모른다. 열악한 여건 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직원들의 마음은 편치 않다. 힘없는 약자다. 주민과 직원 사이에서 내가 평형을 유지하고 중심을 잘 잡으며 보호해야 할 책무를 느낀다. 그렇다고 입주민들의 입장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 생각해 보면, 관리사무소는 물 위에 띄워진 조각배와 다를 바 없다. 파고에 따라 언제든지 엎어질 수도 있는 불안한 항로를 가기 때문이다. 내부 단속도 잘하고 바깥 상황도 살피며 내일도 항행을 해야 한다. 내가 문득 조각배의 선상에 선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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