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고 홈^!^(Gotta go home!)

떠남, 그 이유의 조각들

by 쉐비

"우리는 소장님처럼 좋은 학교 나오고, 좋은 직장 다닌 사람은 필요하지 않아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황 대표가 조롱하는 눈초리로 빤히 쳐다보며 나에게 말했다. 가당치도 않고 과장된 발언이었다. 듣기 거북하고 모욕적인 언사였다. 어떻게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말을 태연하게 할 수 있나. 칼만 들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나의 목에 무딘 칼을 들이미는 행위나 다름없는 폭거였다. 제발 그만두고 집에 가라는 소리였으니까.



아직 인생 경험이 부족하여 이런 황당한 경우를 이제야 겪는 것일까? 아니, 내가 아는 세상은 반쪽에 불과하니 험한 꼴을 더 많이 봐야 한다며 이런 일을 택하게 한 운명의 장난이런가. 황당했고, 당혹스러웠다. 살면서 이런 사람은 처음 봤다는 생각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막무가내에다 당찬 깡다구까지 유감없이 발휘하는 연로한 동대표의 얼굴에는 갑질의 기름기가 철철 넘처보였다. 경험 많은 소장도 시원찮은 판에 여기는 당신 같은 초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압박이었다. 정년퇴직하고 사회경험이 많다지만 그건 어림없다는 핀잔이기도 하였다. '당신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그러는 거요...?(You don't know what you do!)' 속이 뒤집어지고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지만, 좁쌀 같고 뭘 모르는 사람을 그대로 나무랄 수는 없었다. 나는 여전히 부처님 같은 미소를 지으며 황 대표의 눈을 주시하고 있었다. "허허, 그렇군요...!"



70을 갓 넘긴 나이에도 황 여사는 기필코 동대표가 되겠다는 의지를 얼마 전부터 공공연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사실 작년까지 대표를 두 번 역임한 경력이 있어 원칙적으로는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보궐선거 공고를 2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선거구에 출마하는 새 얼굴이 아무도 없었다. 그럴 경우에는 동대표를 두 번 한 사람도 출마할 수 있다는 예외 규정에 따라 단독 출마하였고, 황 여사는 예상한 대로 당당히 당선의 영광을 움켜쥘 수 었다. 대단한 노익장이었다. 당장에 동대표 중 최고 연장자로 자리매김되는 의미도 갖게 되었다. 대표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회장과 감사가 주도하는 일에 빈번히 반기를 들었고, 그들이 추진하는 일의 방향을 바꿔놓기 위하여 갖가지 공세를 펴기 시작하였다. 말 많은 단체 카톡방에 열심히 참여하며 사태가 일파만파로 확산되도록 불을 지르는가 하면, 회의장에 방청객을 동원하며 화력을 모으는 등 가진 수완을 십분 발휘하였다. 산적한 일을 부지런히 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허구한 날 과거사만 파고 있냐며 회장을 공박하였다.



황 대표는 청렴을 모토로 내걸고 당선된 백 회장과 서 감사가 취임 초부터 과거사를 자꾸 파헤치고 나오는 것이 몹시 신경 쓰이고 불편했던 모양이다. 초기 입주자대표회의는 그러한 공세에 맞대응할 세력이 숫적으로 부족한 불리한 구도로 짜여 있었다. 고양이 앞에 쥐처럼 목소리만 높였지 방어도 약한 판세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 불만스럽기만 하였다. 차라리 자신이 전면에 나서 맞서야겠다고 결심하고 공식 이너써클(inner circle, 입주자대표회의)에 들어갈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국외자인 내가 그 깊은 내막을 알 길 없지만, 대립한 두 세력 사이에는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어떤 사연이 놓여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백 회장과 서 감사는 번갈아가며 관리소장에게 문서를 보냈다. 주로 자료제출, 사실 확인에 관한 내용이었고 때로는 업무를 철저히 해달라는 주문과 경고도 담겨 있었다. 문서는 기록을 남기는 것이라서 생산 자체가 신중해야 한다는 건 그들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기에 일부러 확고하게 실행하려는 의도가 예사롭지 않았고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뭐 그렇게까지 할 게 있냐며 일을 부드럽게 하시라고 조언하고 싶었으나, 전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 소장은 할 일 열심히 하면서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고 웃으며 타이르기도 하였다. 일만 정확하게 하면 문제 될 것 하나도 없으니 전혀 걱정하지 말고 그저 협조나 잘해달라는 당부였다. 일만 정확하게 하면...! 속으로는 잘할 자신 있냐며 자문하고 있었다. "아, 네, 잘 알겠습니다.ㅋㅋ " 하지만, 실무적으로는 솔직히 짜증이 났다. 직원들 또한 많이 힘들어했다. 답변자료는 하나를 내더라도 당연히 정확해야 하는데 상황이 상황인 만큼 자못 신경이 쓰였다. 보관상태가 부실한 과거 자료를 찾는데 시간을 할애하다 보면 업무가 뒷걸음질 치는 등 일은 얼마간 지체되고 지장을 받기 마련이지만, 감수해야 했다. 우리는 그들의 속 사정이야 뭐가 됏든간에 옳고 그름을 따져서도 안 되고, 또한 따질 필요도 없이 자료요구에 성실히 임하면 될 일이었다. 관리주체는 중립을 지키고 불편부당해야 하니까.




그런데, 애당초 아파트 관리사무소 일을 다소 가볍게 생각한 것은 크나 큰 나의 오산이었다. 특히 대표와 대표들 간에, 혹은 주민과 대표들 사이에 4분 5열 된 채 물고 물리는 갈등과 분란이 끊이지 않는 물밑 사정을 간과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상황은 심각하고 엄중하였다. 뒤늦게서야 그런 정황을 알고 나니 정신이 바짝 들었다. 굳이 문서를 시행하고자 하는 회장단의 소통방식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관리사무소를 위해서도 필요하고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회장단은 지방자치단체의 행정감사가 전가의 보도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공을 들이며 절차 추진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곡절 끝에 표결에서 황 대표를 비롯한 반대세력의 벽에 부딪쳐 부결되는 어이없는 결과를 지켜보아야 했다. 충격이었다. 그날은 예상외의 쓴 맛을 보고 기세가 한풀 꺾이는 분수령이 되었다. 그렇다고 뜻을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었다. 뜻을 같이 하는 서 감사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추후 다시 추진하여 기필코 성사시키겠다는 각오는 변함없이 굳건하였다. 언제 어떻게 재추진할 것인지 궁리하며 그 실행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나는 굽히지 않고 그 문제에 매달리는 백 회장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스트레스였지만, 그 역시 드러내 놓고 만류할 상황도 아니었다.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하더라도 관리소장에게 감사라는 것은 정말 반갑지 않은 일이다. 각종 관계 법령에 벌금과 과태료가 지뢰밭 같이 깔려있는 마당에 일부러 손을 번쩍 들며 감사를 자청한다는 것은 소장으로서는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불가피 수감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제발 와달라고 일부러 부르는 판이니 이 얼마나 속 쓰리고 야속한 일인가. 감사 준비를 하고, 지루하게 여러 날 계속되는 수감 장면은 생각만 해도 질릴 지경이었다. '아, 그럴 바엔 나가고 말지...' 내내 그칠 줄 모르는 민원에 시달려 이미 지쳐있던 나의 마음은 인내의 한계를 느끼며 서서히 떠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음이 약할 대로 약해지고 의욕마저 바닥을 헤매던 어느 날, 탁 대리가 입주민에게 욕설을 퍼붓는 바람에 아파트 단지가 발칵 뒤집히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출퇴근하듯 관리사무소를 자주 찾는 추 여사가 그날도 일찌감치 민원창구 앞에 나타났다. 어제 했던 나무 전지작업을 왜 그 모양으로 했냐고 다짜고짜 불만스럽게 지적하며 일을 제대로 하라고 다그치는 것이었다. 만사 이래라저래라 하며 간섭하고, 안 되면 민원을 제기하는 추 여사는 일명 징글머니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단톡방을 들락거리며 기름을 붓듯 파문을 확산시키는 작태는 황 대표와 오십보백보로 다를 바 없었다. 이런저런 일로 관리사무소에 불만이 쌓이고 적개심까지 품고 있던 추 여사의 태도는 다분히 감정적이고 공격적으로 보였다. 일부러 탁 대리를 겨냥하고 찾아온 것 같기도 했다. 그들 두 사람은 날 작업 현장에서 일하는 방식을 두고 서로 고함을 지르며 이미 한바탕 일전을 치른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절제하며 고분고분한 모습으로 추 여사를 대하는 듯하던 탁 대리가 갑자기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여 육두문자를 내뱉어버리고 말았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만류할 틈이 없었다. 그가 그런 폭언을 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돌발행위였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탁 대리가 안타까웠지만, 소장인 나의 입장 또한 난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돌이키기 어려운 사태였다. 노인한테 이럴 수 있냐며 추 여사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방방 뛰었다. 소장이 책임지고 교육하겠다, 대신 사과하겠다, 직원으로 하여금 사과하도록 하겠다고 타협을 시도하였지만 추 여사는 요지부동이었다. 주민들을 규합하고 관리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하겠다며 소장이 책임지고 자르라고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당한 일을 알리고 응분의 조치를 요구하겠다며 본사까지 달려가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주민들의 불만에 약한 본사 담당자는 서비스 실패는 용납할 수 없다며 추 여사의 요구를 그대로 나에게 전하며 압박의 강도를 더하였다. 하지만, 예초에 직원이 하는 일에 입주민이 부당하게 간섭하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이 욕설 폭언을 하였다는 사실을 뒤덮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나저나 의욕 상실이었다.




그 마을에서의 1년을 돌아보면 마치 10년을 보대끼며 보낸 것 같은 기분이다. 청렴을 모토로 내걸고 전면에 나선 사람들이 그 선하고 숭고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아이러니였고, 이해하기 어려운 에피소드로 기억될 것 같다. 주민들은 왜 그들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호응을 끝내 보내주지 않은 것일까. 그들은 또 왜 뜻을 관철하지 못하고 좌초할 수밖에 없었을까. 하나같이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곱씹어볼 점도 적지 않게 남겼다. 많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단톡방은 양날의 칼이 되는 것이니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대개는 좋은 취지로 시작하지만 분란과 파국의 불쏘시개로 전락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섣불리 만들 일이 아니다. 충고 한마디 덧붙이자면, 입주자와 사용자를 통칭하는 입주자 등도, 완장을 찬 입주자대표회의 구성원들도 갑질을 금지하는 조항이 법령과 관리규약에 명시돼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 일이다. 이러한 약자 보호 규제는 또한 갈수록 강화되고 있는 추세다. 역시 걸면 걸린다.


악몽에서 깨어난 듯 한동안 일했던 아파트 단지를 뒤로 하고 떠나던 날. 나의 마음은 시원섭섭하였다. '자, 집으로 가자!' 차에 올라앉아 시동을 켜고 보니엠(Boney M) 음반을 켰다. 특유의 경쾌한 전주곡에 금방 빠져들며 가사를 흥얼거리기 시작하였다. 홈, 홈, 가라고 홈^!^(Gotta go home!). 심란한 마음이 샤워하듯 금세 씻겨지는 기분이었다. 그 마을에 평온이 깃들기를 바란다.

keyword
이전 07화'매사추세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