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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쩔기자 Aug 05. 2022

재벌, 월요일 한낮의 결혼식

[산업부 어쩔기자 일지⑭]

"이렇게 중요한 행사가 있었는데 일정 보고도 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월요일 아침부터 부서 단톡방이 난리다. 재계 총수 일가 개똥이 결혼식 일정 보고를 아무도 하지 않았던 것.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데스크가 불같이 화를 낸다. 시말서 얘기도 오간다.      


'뭐야, 설마 내 나와바리야?'


서둘러 기사를 찾아본다. 다행이다. 내 담당이 아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리고 마음의 여유를 갖고 기사를 찾아본다.      


A그룹 총수 일가 개똥이의 결혼식.      


혼맥으로 연결되는 재계에서 재계 총수 일가의 결혼식은 산업부 기자가 중요하게 챙겨야 할 행사다. A그룹과 B그룹 총수 일가가 결혼을 통해 혼맥으로 연결될 경우, 그룹 간 사업적 시너지 등 앞으로 경영상 변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4대그룹 총수 결혼식 참석'

'두 시간 전 제네시스 OOO타고 혼주 참석'

'소똥이 부회장과 딸 식장 입장'

'말똥이 OO그룹 회장 예식 시작 전 입장'     


줄줄이 기사가 딸려온다. 정장과 명품옷, 명품 가방을 걸친 재벌들의 번쩍번쩍한 사진도 눈에 띈다.      


별들의 잔치다.      


월요일 오후 2시 개똥이의 결혼식. 

기사를 찾아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평일 오전, 게다가 월요일 오후 2시에 결혼식이 가능하다고?     




"월요일엔 연차내기 좀 부담스러워. 팀장 회의도 있고."     


아이가 열이나 새벽 내내 잠을 설쳤던 월요일 새벽. 


난 이미 지난 주에 연차를 썼고

남편은 월요일이라 연차를 내기 부담스러워 발만 동동 굴렸던 그 날,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살고 있는 친정엄마를 소환해 간신히 출근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출근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이렇게 까지 하면서 일을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월요일엔 늘 일이 많다.     




"미안해 닭똥아. 결혼식 못 갈 것 같아."     


같은 부서에 있었던 닭똥이 기자의 결혼식. 일요일 오후 3시 결혼식이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닭똥이 기자의 결혼식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가려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다가올수록 생각이 많아졌다.


'아, 남편 없어서 아이들 맡기고 결혼식에 가야 하는데 누구한테 맡기지?'

'일하느라 평일엔 애들 얼굴도 잘 못 보는데 결혼식에 갔다 오면 하루 반나절은 버릴거야.'


'하, 주말인데 좀 쉬고 싶다.'     


그리고 이런 저런 핑계를 정리하고 닭똥이 기자에게 카톡을 보낸다.      

"작은 성의는 OO이 편에 보낼게..."     


결혼을 하는 사람에게도, 결혼식에 참석하는 사람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요일 오후 3시 결혼식.

      

결혼식은 당연히 주말에만 하는 건 줄만 알았다.      

그런데 재벌은 월요일 오후 2시에도 결혼식을 한다.


사람에겐 모두 같은 하루 24시간이 주어진다는 생각. 

스스로 변화하려면 하루 24시간을 쪼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가며 다크서클은 코끝까지 내려왔는데,


월요일 한낮의 결혼식을 보며


아등바등 사는 게 의미가 있나?


모든 사람에게 같은 초시계가 돌아가지 않음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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