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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 안 해줘서 고마워요.

by 해니

감기 걸린 딸에게 약 좀 먹으라고 잔소리를 한지 며칠 째, 그중 유난히 더웠던 어느 날 아이가 윗도리를 대충 입고선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는 모습을 봐버렸다.


“감기 걸렸는데 헐벗고 있지 말고 반팔이라도 입고 있어! 덥다면서 긴바지는 대체 왜 입고 있는 거야. 반바지로 갈아입어!”


귀찮아하는 딸아이가 삐죽 대는 동안 서랍에서 바지를 꺼내 책상에 올려놓고 나왔다. 그리고 조금 뒤에 건조가 다 된 빨래를 개켜 딸아이 방에 가져다 놓으려 방문에 노크를 했다. 똑똑!


“잠...... 잠시만!”


허둥대는 소리가 들려 ‘어?’ 하고 촉이 발동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연 아이는 방금 옷을 입은 모양새로 머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너, 옷 안 입고 있었지!!!”


반팔이 싫으면 난닝구라도 입고 있지 왜 훌렁 벗고 있냐고 속사포처럼 잔소리를 퍼부었다.(아이고 이 가시나야) 아까 꺼내 준 반바지가 걸레처럼 대충 구겨진 채 서랍장에 들어있는 것을 보니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안 그래도 엊저녁부터 가래와 목쉼 증상이 심해져서 더 신경 쓰고 있었는데 나으려 애쓰기는커녕 감기를 더 심하게 만들고 앉았는 딸내미의 모습에 속이 터졌다.


지금은 내가 무려 ‘엄마’라는 타이틀을 달아버린 바람에 자식에게 잔소리를 하는 입장이 되었지만, 돌이켜보면 저 나이 즈음의 나는 ‘속 터지는 애’였다. 게으르고 굼뜬 아이, 그게 나였다. 언제나 아침에 일어나는 걸 힘들어했고 씻는 것도 귀찮아했다. 방청소라는 개념도 없어서 엄마는 내 방을 볼 때마다 ‘돼지우리’라고 불렀다. 부모에게 ‘돼지우리’ 소리를 들어보는 게 비단 나뿐만은 아니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 당시 내 방에만 바퀴벌레가 살았었다. 그 정도로 심각했다 보니 빠릿빠릿한 숙희 씨 입장에서 저 화상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싶었을 게다.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은 기억이 별로 없다. 실제로 많이 안 한 건지 아니면 내가 선택적 기억 상실로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는 싫은 소리를 하는 대신 본인이 알아서 묵묵히 일했다. 자잘한 빨래라든지 베란다에 강아지가 싼 소변자국 정리라든지 나와 동생에게 제발 좀 하라고 잔소리한 적이 없었다. 몇 번 했는데 귓등으로도 들어가지 않는 걸 보고 포기했나? 숙희 씨 성격상 그랬을 수도 있겠다.


그런 엄마를 보고 자란 탓인지 나도 잔소리를 거의 안 한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집에서 잔소리를 제일 많이 듣는 건 나다.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느릿느릿하고 잘 미루며 쉽게 늘어지는 터라 딸내미에게 볼멘소리를 많이 듣는다.


“엄마, 이거 몇 월 며칠까지인데 그전에 미리 해줘요.”

“엄마, 전에 얘기한 거 했어요?"


해야 할 일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잘 챙기는 초6 여자아이 앞에서 마흔 살의 엄마가 우물쭈물한다.


“어 그거 금방 할게~”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자기가 알아서 잘하는 아이를, 감기 때문에 눈물 쏙 빠지게 타박한 나도 사실 유구무언이다.(먹지 않아야 할 음식을 굳이 먹어서 위장병에 시달리는 중인지라......) 아마 저 위에서 ‘너도 잘한 거 없다~’라며 숙희 씨가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엄마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굼벵이 딸내미에게 잔소리 많이 하지 않아 줘서 고맙고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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