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엄마가 쌀 타작하는 데 매번 기계 빌려서 하는 거 불편하다고, 하나 있음 하시더라"
-............
"그거 사줬으면 하시더라고"
갖잖아서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바로 일주일 전 야외데크를 해드렸단 말이다. 나로선 큰맘 먹고.
통장에 500만원 송금 잉크도 마르기도 전에 뭐?
한마디를 하려다 꾹 참은 건. 그럼에도 시부모님의 일이고, 말을 꺼내자면 비난조가 나올듯 하여,
먼길 운전해 서울까지 오는데 괜시리 맘상할 듯 하여, 입을 다물었다.
당장 싸울 일도 아녔다. 이미 가을걷이가 끝났으니, 내년에 추수께나 다시 꺼낼 얘기였다.
당시엔 옹심도 났지만, 내 성격에 또 투덜대다 사드리게 될 가능성이 9할이고, 일단 당장 급한 일이 아니니.
뭣보다 나에겐 500만원 지출을 잊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일주일 후, 월급날 남편이 돈을 부친 거다. 낯선 여자이름 '정미기'에게!!
바로, 그거였던 거다.
정미기는 누꼬?
"쌀 도정하는 기계"
-저번달 카드 많이 써서, 펑크날까 말깐데, 그래서 그 돈을 부쳤다고?
"카드 펑크내지 뭐"
"야!!!!!!!!!!!!!!!!!!!!!!!!!!!!!!!!!!!!!!! 당장 나와"
이렇게 된 상황이었다.
그날 우리 차는, 나의 고함과 분노의 포효로, 옵션에도 없었던 썬루프가 자체 뚫릴 지경이었다.
"자...따져보자. 작년에 집짓고 싱크대 붙박이 식탁 티비장 누가 해줬냐? 어무니 공부하고 싶다고 해서, 그 학비 2년간 누가 댔냐? 내가 댔고! 환갑때, 경주이씨 삼형제가 동남아시아로 여행보내드리자고 했을때, 쫌 더 보태서 호주 여행보내드린 거? 그거 누구야? 김해김씨 내가 했냐? 경주이씨 삼형제가 했냐?"
"요보"
"이번에 데크 누가 해주자 했냐?"
"요보가"
"근데!!!!!!!!!!!!!!!!!!!!!!!!!!!!!!!!!!!!!! 누구 맘대로 내 동의없이 돈을 보내?"
"내가 얘기했는데..."
"얘기했지 내가 그러라고 했어? 뭐어? 카드 펑크내면 되지?
본격 농사를 지으시는 것도 아니고. 뭣보다 이미 추수 끝났고, 사도 내년에 사면 되지.
그게 카드 펑크내서 사다가 창고에 1년 묵힐 일이야? 정미기가 묵은지냐? 그리고, 뭣보다 지금 내 주머니 사정보다 어무니가 낫거든."
"......"
"이제 경주이씨 집안일은 아무것도 아닐테니, 혼자 다 할래?"
"아뇨"
"앞으로, 시댁으로 가는 돈은 십원 한장이라도 내 이름으로 보낸다. 알았나?"
"눼"
주머니 돈이 쌈지돈인데, 누구 이름으로 보낸들 무슨 상관이냐고 하겠지만,
흔한 고부갈등, 그 사이에서 부부싸움이 일어나는 것 중 하나가.
남편이 아내 몰래 하는 시댁일이다.
며느리가 야박해서 아들이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하는 경우도 숱하게 봐왔고,
반대로 시어머니가 해도 너무한 요구를 아들에게 해서 불화를 겪는 것도 봤다.
시댁으로든 친정으로든 모든 금전의 이동 상황은 부부가 공유해야 한다.
남편은 그날 내 앞에서 어머니께 전화했다. 엄마 돈 받았나? 며느리가 사준거다. 잘쓰래이~~
사실, 내 통장에 들어온 내 원고료를 시어머니께 보내드린다 한들.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보내준 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 이름으로 보내도 그 돈은 아들이 보낸 돈이 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며느리 이름으로 보낸 돈의 의미'는 '아들며느리가 공유하지 않은 일은 없음' 의 상징이었다.
그래서,십원짜리 하나도 내 이름으로 송금했다.
자꾸 며느리 몰래 아내 몰래, 아들과 어머니의 전선이 구축되면.
단언컨데 불행의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친정 처가일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도 있다.
아는 동생이 남편이 자기 몰래 어머니께 돈을 보낸다며 대판 싸우고 중재를 요청한 적이 있다.
그 동생의 남편은 끝까지 잡아뗐지만,
나에겐 원래 보내드리는 돈 20만원 말고. 얼마쯤 더 보내드린다고 고백했다.
시어머니의 청상과부가 돼, 남매를 어렵게 키웠다. 노후대책이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대한민국에 많고 많은 사연이다.
난 그 동생에게 물었다.
"얼마보내니?
"20"
"너희 시어머니 수입은 있으시고?"
"없어요."
"재산은?"
"없어요"
"그런데? 너는 20만원 가지고. 아파트 관리비내고 전기세 수도세 가스비 내고, 쌀사먹고 할 수 있어?"
"아뇨"
"근데? 너 성당에 한달에 얼마내니? 헌금?"
"15만원 20만원?"
"하느님이 오냐 기쁘다 하실 것 같냐? 내가 하느님이라면, 나는 됐으니 시어머니 갖다드리라고 할 것 같다.
너 이번에 가족끼리 해외여행다녀왔자나. 얼마들었냐? 몇백 들었지? 어쩌라고? 니 시어머닌 어쩌라고? 그리고, 엄마야 죽든말든 마누라랑 새끼들만 챙기는 남편? 난 정떨어질 것 같은데? 그런 남자 매력없잖아.
야. 40만원 보내드려."
때가 되면, 부모와 자식이 독립해서 살아야 하는 게 맞지만, 여건이 안되면 어쩌겠는가?
없어도 쪼개서 나눠쓰며, 일단 살기는 살면서 해결 방법을 찾아야지 않겠는가?
다만, 아내나 남편, 시부모님 장인장모 역시 선은 넘지 말아야 하고.
모든 일은 부부가 공유하고 공감해야 함은 물론이란 게, 나의 짧은 생각이다.
웬수같은 정미기.
그 덕에 시부모님은 해마다 건강한 쌀, 건강하게 도정해서 보내주시니, 감사하고 감사한 일이지만.
여하튼, 정미기는 괘씸했었다. ㅎㅎ
이런 글을 올리면, 애많은김자까의 시부모님이 부당하게 뭔가 자꾸 요구하시는 것 같지만,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아마도 아들에게 정미기를 사달라고 하지도 않으셨을 거다. (사주면 좋겠지만의 뉘앙스는 풍겼을지라도) 그렇게 말씀하실 분들이 아니다.
무엇보다 평소 우리가 보태드린 것 보다 받은 게 많으니(유산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 고마움을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아이 다섯을 낳고 20년을 살고 보니, 부부가 공유하지 않은 일은 없어야 하겠기에, 긴긴 글을 적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