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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많은김자까 Sep 17. 2019

아빠, 이제 아버지라 부르고 싶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9월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집안은 온통 캄캄했다.

아무도 없으려니 하고, 불을 켰는데

"딸 왔니?"

아빠였다.

"깜짝이야. 왜 불도 안켜고? 벌써 퇴근했어?"

아니라고 다시 나가봐야 한다며, 

곁에 와 앉아보라고 했다.

아빠 곁에 풀썩 앉으니,

아빠는 볼을 비며, 날 꼭 안았다.

"우리 그거 한번 할까? 오랜만에?"

"싫어. 무슨 애야? 아직도 그걸하게?"

"한번만 하자아~"

아주 어렸을때부터

우리 부녀는 10년만에 만난 부녀 상황극을 하며

깔깔 즐거워 했었다


아니 이게 내딸 OO이란 말이냐

아저씨가...그럼 우리 아빠?

오냐 내따알~~

아빠아~~~

하며, 끌어안고 막이 내리는데


엄마 오빠그때마다 눈꼴사납다

고개를 절레절레했지만,

우리 부녀는 그래도 좋아죽었다.


머리 굵어진 딸이 이젠 그 상황극에

적극 응해주지않는데도

아빠는 한번씩


아니 니가 내딸 OO이란 말이냐

를 시작했고.

난 어린시절 읊던 대사와는 달리, 심술맞게도

아저씬 누구세요

로 응수했다.


그날도 아저씬 누구세요라며

뚱하게 받아치고, 아빠를 바라봤는데,

아빠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빠는 나가봐야겠다며

서둘러 일어났다.


그리고, 얼마뒤 엄마가 들어왔지만,

어디 다녀오냐는 질문에 대꾸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궜다.

그리고 엄마방 전축에선

'당신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가 흘러나왔다.


모두가 이상했던 그날. 아빠는 위암 말기선고를 받았다.

아빠나이 49. 엄마나이 44. 그때 엄마는 나보다 젊었다.


아빠에게 우리에게

반년 일년안에 무슨 일이 생겨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아빠는 완치와 재발 끝에 

우리곁에서 10년째를 맞았다.


하지만, 하늘이 허락한 시간은 그게 다였다.

직장 화장실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간 날,

암세포가 아빠의 머릿속까지 파고들었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일반병실에서 한달을 보내다,

주치의의

호스피스병동으로 옮기라는 권유에

아빠는 절망했다.

우리가족은 10년간

죽음에 대한 절망과

완치에 대한 희망,

그 둘을 부여잡고 살면서,

마지막에 대한 연습과 각오를 다져왔지만.

연습은 연습일 뿐이었다.


호스피스병동에서 13일째.

병동수녀님은 또다시 방을 옮겨야겠다고 말씀하셨다.

임종의 방이었다.

그날 아빠는 의식없이

띄엄띄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의식은 없지만, 다 듣고 계신다"는
호스피스 수녀님의 말씀도 허투로 들렸다.
임종을 기다리는 아빠를 위해
그저 종일 혼자만의 기도를 하다...
참을수 없는 설움에
아빠 손을 잡고 "아빠~~"하고 통곡하듯 불렀더니
그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빠는 그날 그렇게 이승에서의

58년 짧은 소풍을 마치고 돌아갔다.


양력 9월 18일. 아빠 떠난지 올해로 20년.

누군가 묻는다.

아빠가 살아돌아오면

무엇을 하고 싶냐고. 어떤 말을 하고 싶냐고.


다들 눈꼴사납다던 아빠와 나의 상황극.

'20년만에 만난 아빠와 딸'

"이게 누구란 말이야...정녕 내딸 OO이란 말이냐"


그리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빠. 이제 아버지라 부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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