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프란시스 하> -
겨울 방학이 거의 끝나가는 날, 늦은 오후였다. 개강이 얼마 남지 않았던, 시간 많은 대학생이었던, 나는 무언가의 영감을 받기 위해 자꾸 찾아 헤맸다. 혼자 하는 술래잡기랄까? 목적이 없었다. 그냥 허기였다. 공허감이었다. 스스로 되게 텅 비어있다고 생각했다. 창조적인 일을 꿈꾸면서 가만히만 있는 스스로에게 느끼는 한심함이 제일 컸던 것 같다. 그렇게 계속 무료 영화 목록을 리모컨으로 뒤지면서 무엇을 보면 이 허기가 조금은 달래질까 싶었다. 그러다 원래는 다른 영화를 누르려고 했는데 실수로 누른 영화가 이 영화다.
영화 <프란시스 하>, 뉴욕의 어느 보통 여자, 프란시스를 그리고 있다. 프란시스는 27살의 무용수 연습생이다. 무용수를 꿈꾸며 뉴욕에서 생활하지만, 꿈은 좌절됐고, 제일 친하던 친구와는 멀어졌고, 지낼 집까지 사라졌다. 그런 그녀의 성장이야기이다. 주인공 프란시스는 상당히 행동이 과하고, 같이 있기에 편한 캐릭터는 아니다. 난데없이 싸움놀이를 제안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머리채를 잡기도 하는, 쉽게 다가가기 어렵다. 겉으로는 어느 누구보다 활달하다가도 실제로 보면 어느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는, 그에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언제까지고 친할 것 같았던 친구’와 ‘그토록 하고 싶어 하는 춤’과 ‘머무를 수 있는 집’과 이별을 했으니 그녀가 감내해야 할 고통이 어땠을까싶다. 그녀는 그래도 괜찮아. 또 길은 있겠지 하면서 웃는다. 그 웃음이 마냥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버티는 것 같았다. 그녀의 고집이 보였다. 힘들고 지친다고 하면 정말 그녀 스스로 포기해버릴 것 같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려 애쓰는 듯했다. 그래서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그녀를 계속 보게 됐다. 영화에서 이미 늦은 나이라고 이야기되는 27살의 그녀가 천천히 성숙해지고 성인이라는 한 개체로 나아가는 모습을 따라가니 그녀가 빛나보였다.
처음에는 나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다른 그녀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 무례하고 지나치게 솔직한 언변은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할 정도였다. 그렇게 그녀가 빛을 내지 못하는 이유, 그리고 반대로 그녀가 빛나는 이유는 같다.
‘꿈을 좇고 있다는 것’
참, 솔직하게 그려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바라는 것과 현실의 괴리에 좌절하면서도 놓지 못하는 그런 마음. 계속 끝까지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 그게 너무 예뻤다.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프란시스는 아직 좀 더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는 어떤 영화 주인공처럼 영웅도 아니며 비범한 능력을 가지지도 않았고, 가장 보통의 그녀지만, 꿈을 좇는 것은 그녀를 빛나게 했다.
어쩌면 무례하기도 하고 실수투성이인 그녀지만 ‘빨강머리 앤’과 같은 인물이랄까?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으니 다행이지’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 빨강머리 앤 중에서.
그리고 관계에 있어서 프란시스는 서툰 모습들이 많다.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서도, 대화의 일부를 보면 자학적인 대사도 등장한다. ‘난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에요.’하며 허허 웃어버린다. 그 자리의 분위기는 확 싸해진다. 그녀의 자존감이 얼마나 낮은지, 그 때문에 관계에 있어서 그녀가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얽매이게 됐는지 말이다. 이 시작은 분명 그녀의 역할 찾기에서 계속된 실패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는 그녀가 비록 꿈꾸던 무용수를 성취하지 못했지만 자기 자신의 역할을 찾아가며 회복되어 간다. 언젠가 영화 속에서 말하던 그런 이상적인 관계로 소피와의 관계가 회복된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제가 원하는 어떤 순간이 있어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우리만 아는 그런 세계, 이번 생에 그 사람이 내 사람이라서 거기에 존재하는 비밀스런 세계를 만나게 되는 거죠.”
이렇게 그녀가 성장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타협도 존재한다. 그것은 원래의 목표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다른 목표를 성취한 것이다. 타협을 마냥 비겁한 행동으로 보는 건 섣부른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재능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무대 연출을 하며 피워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역할을 잡아 성인으로 한 발짝 내딛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그녀는 자신의 우편함에 이름을 적어 넣는데, 워낙 긴 이름인 탓에 ‘프란시스 하’까지만 드러난다. 정말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사실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모두 다 마지막 장면 때문이었다. 그녀는 길고 긴 방황의 시간을 보내며 엄청 다양한 곳에서 생활을 했다. 본인의 집은 없었다. 프란시스는 현실을 살아가는 보통이고, 삶의 공간이 필요한 인물이다. 그녀는 삶의 공간이 집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그녀의 집이 어디인가에 따라서 진행되는 영화다. 그녀가 어디서 살아가고 있느냐가 중요한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소피와 우정의 공간이었던 집'
'레브와 벤지의 집, 부자친구들의 집'
'부모님의 집'
'무용가 친구의 집'
'파리의 작은 아파트에서의 이틀'
'자신이 졸업한 대학교의 기숙사'
그리고
'자신의 집'
이렇듯 삶의 공간을 오롯하게 얻는 것은 자신의 독자적 자아를 완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을 괴롭혔던 관계들에게서도, 자신이 꿈꾸던 모습과 자신이 다름에게서도, 독자적으로 그녀는 깨부수고 나왔다. 또한 이렇게 그녀의 공간은 수차례 변화한다. 이것은 끊임없이 바람에 휘둘리고 삶에 치이는 청춘들의 모습, 보통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녀의 첫 집 장만을 정말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