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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덴부와 셜리 Nov 20. 2023

날아오는 주먹쯤, 쉽죠-이 말에 권투장 등록하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사는 두 사람의 운명이 같은 패턴으로 전개될 수 있다.
- 평행이론


권투장은 "내가 뽑은 서울 3대 통닭집" 중 한 곳과 아주 가까워서 자주 지나가곤 한다.

오늘은 한번 가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잠깐 딴 이야기를 하자면, 3대 통닭 중 하나는 미아사거리역의 <한국통닭>, 두 번째로 노들역의 <가본 통닭>이다.

세 번째 집이 권투장과 가까이 있다. 통닭의 맛을 평가하는 것 중 하나는 슬개골이 분홍빛이 나야 한다. 이 집은 뼈가 분홍빛이 날 정도로 신선하다.

(맛과 가격, 특히 가격경쟁력으로 3대를 걍 뽑았다. 한강,한방 등등은 많지만..)


지하 권투장에서 본 강남사모님


권투장에 내려가봤다. 제법 많은 사람이 운동하고 있었다. 놀라웠다.


어라?

권투장 구석에 전형적인 강남 사모님이 서있었다. 의상이나 구두, 가방이 화려하지 않지만 단아하게 세팅되고, 톤 다운된 깔끔한 중년여성이 있었다.


반대쪽에는 젊은 여성도 샌드백을 치고 있어서, 이 사모님도 권투를 배우려나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 옆에 아들과 함께 관장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역시 누군가 와서 말을 걸어주었다.


"안녕하세요. 곧 관장님 오시니 기다리세요."


나도 구석에서 뻘쭘히 서있었다. 사모님 옆에 누구지? 바로 보니 아들 같았다. 왜 왔는지 단번에 알겠다.


나의 과거, 또는 도플갱어가 눈앞에 나타나다.


그 아들은 나인 줄 알았다. 중학생 아들이었다.

얼굴은 나와 닮지는 않았지만,…내가 더 잘생겼다.


하지만 딱 봐도, 공부는 어느 정도 할 것 같은 데, 성격 좀 모나면서 내성적이겠구나. 그런데 친구가 없게 생겼다. 맞고 다니지 않으면 다행인 것처럼 생겼다.

과거로부터 내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행이론일까? 혹시 나일까?


평행이론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은, 같은 운명의 패턴으로 산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이 어느 순간 만나게 된다면?

그게 오늘일지도 모른다. 평행이론, 그 운명의 접점이 오늘 권투장이었다.


도플갱어가 아니라 사실 모두가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한 장소에서 모인다.

나는 나대로, 또는 각자의 요구대로 그 장소에 모인다.

그런데 필요한 게 같으면 얼굴느낌이나 풍기는 외모가 비슷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 에너지가 필요하니까


드디어 관장님이 나타났다.


관장님은 딱 달라붙은 스키니 진 청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스키니진.. 헉 소녀시대의 ‘Gee’ 이후 오랜만이었다.


관장님의 말은

west southern accent가 살짝 묻어났다.

웨스트 서던(서남쪽) 특유의 강인함에 묻은 능글능글함, 유머, 과장이 섞여 있었다.

게다가 얼굴에 비해 눈웃음을 치시는 스타일이었다.


“권투는 폼이 예뻐야 합니다.”


우리 권투장에서 배우면 권투폼이 예쁘다고 했다. 예쁘다? 이런 말을 쓸 수 있구나.

그러면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6개월만 연습하면 날아오는 주먹쯤은 눈에 보입니다. 주먹을 보면서 피할 수 있게 되죠.. 삭삭


이 말을 하는 데, 옆을 보았다.

시추에이션을 짰나? 마침 우리 옆에서 두명의 연습생이 스파링을 하고 있었다.

영구와 맹구인가?

슉슉..


난 그 장면을 배경으로 관장말을 계속 듣고 있었다.

영구와 맹구가 권투 할 곳이었지만, 너무나 재미있어 보였다. 진지했다.


게다가 날아오는 주먹을 눈으로 볼 수 있다니…

이 말에 혹했다. 난 사실 감동했다.

날아오는 주먹이 보이다니…


난 등록하기로 결심했다.


가격도 다른 곳에 비해 거의 반값이었다.

샤워시설도 있다지만, 난 가볼 엄두가 안 났다. 깔끔한 내 성격에..


모든 칼은 본능적으로 피를 그리워하는 법이지만,
 좋은 칼은 본능을 능히 억제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진다는 얘기다.
 - 이외수의 소설 <칼>

본디,

칼은 피를 부르고

무술은 살생을 목적으로 한다.


나는 어떤 목적으로 권투장을 갔는가?

간단하다. 날아오는 주먹쯤 눈으로 쳐다보며 피하는 것이다.


어떤 운명이든, 숙명이든 내게 날아오는 것들은 눈으로 쳐다보며 대응하듯 말이다.

그리고 마음의 근육은, 몸의 근육이 없으면 마음도 영혼도 단단히 지켜낼 수 없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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