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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한잔

예쁜 컵에 물 한잔을 따라서 드셔보세요.

by 라파

커피 마셔야지.


전기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커피머신을 켰다.


REFILL BEANS (원두 없음)


원두를 넣으면 그라인딩 하여 에스프레소까지 추출해 주는 커피머신에 표시된 안내.

커피원두야 어디 있니? 부엌을 수색했다.

그러나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지난번에 선물 받은 커피 드립백이 있을 거야. 찾아보자.

그러나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오랜만에 믹스 커피를 마셔야겠다. 분명히 어디 있을 거야...

그러나 없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라는 존재는

조금 있다 마셔야지 하며 몇 차례 참았다 마시려던 거라서

더 실망했다.


"툭"


내 심정은 상관없다는 듯 전기 주전자는 물이 다 끓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할 일을 하는 무심한 프로의 모습이 저런 것일까?


강제로 '차'를 마셔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컵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카톡"


카톡이 왔다. 자료를 메일로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기다리던 자료였기에 티백을 넣는 것을 깜빡하고 잔을 들고 책상으로 갔다.

자료를 확인했다. 간단한 피드백과 함께 감사의 말을 담아 메일에 회신했다.

그리고 아주 서서히 식어가던 맹물을 마셨다.


"후르릅"


늘 이 시간에 맛보던 따뜻한 커피를 기대했던 나의 뇌는 살짝 당황했다.

정말 오랜만에 그냥 따뜻한 물. 맑고 투명한 맛과 자극 없는 수증기 향.

온도도 알맞고 바디감도 좋았다.


이렇게 맛이 있을 줄이야?


향과 맛과 질감에 특성을 부여하여 서로의 매력을 뽐내며 홍보하는 커피와 차사이에 단 한 번도 나에게 어필하지 않았던 물. 언젠가 맛보았지만 잊고 있었던 그 느낌. 다시 찾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물맛이 좋지 않은 나라에서 커피나 차 같은 것이 발달했었다는 말을 어디 선가 주워 들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 같이 산이 많아 물이 깨끗하고 맛있는 곳은 드물다고. 물이 많아 여름에 습한 단점도 있지만. 물맛은 정말 감사한 무료 럭셔리가 아닌가 싶었다.


커피콩이 없어서 크게 실망했지만, 커피콩의 부재는 물의 존재를 낳았다.

그날 이후 난 종종 예쁜 컵을 신중하게 골라 뜨거운 물을 부어 잠시 식힌 후 마신다.


그리고 매번 찬찬히 느낀다.


아무것도 더하지 않아도

맑음이라는 것으로 가득 차있는 물을


머그잔.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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