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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Q 파일

자백의 늪 ⑦
사건 상인

by 재원


<⑥ 미아동 새벽 3시의 범인>에서 이어집니다.



지금까지 확보한 모든 정황과 간접 증거는 한 가지 결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2004년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이병주라는 것이다.


나를 고심하게 했던 그의 편지 525통은 아주 성실한 거짓말이었던 셈이다. 여기까지 상황을 생각해보니 이병주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도대체 왜 이렇게 편지를 보내고, 형사들을 불러들이며,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는 걸까?


이런 부류의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질문은 결국 단 하나로 모인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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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피 교도소


우리는 이병주와 같이 청송교도소(현 경북북부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인물을 어렵게 찾아냈다.


한국의 교도소는 수형자 등급별로 4단계로 나뉜다. 그중 청송2교도소는 S4(중경비처우급)의 가장 악랄한 범죄자들이 주로 모여있는 곳이다. 교도관들도 범죄자들도 ‘청송2교’만큼은 피하고 싶어 한다.


박모씨는 이병주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이병주의 일과가 여느 죄수들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그 형은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종일 거의 사건 얘기만 해요. 90퍼센트가 명일동, 미아동 사건 얘기였어요. 서류가 엄청 많은데 그걸 항상 펴놓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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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는 어떤 이유에선지 사건 자료를 펼쳐놓고 매일 그것을 연구했다고 한다. 그렇게 자료를 외우다시피 읽은 뒤에는 전국 경찰서에 편지를 쓰며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왜일까?


“일단은 청송을 벗어나고 싶다, 서울을 가든 어디를 가든 청송만큼은 벗어나고 싶다는 거죠. 왜냐, 여기는 살인이니 강간이니 강력범들이 바글대는데 다른 데는 무기수라고 하면 좀 대우해 주거든요.”


청송을 벗어나고 싶은 이병주가 자꾸 사건을 벌이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수사와 재판이 시작되면 관할 청에 가까운 곳으로 수형자가 거처를 옮겨 조사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큰 이유는 무조건 돈이에요 돈. 나는 여기서 죽어나갈 사람인데 돈이라도 벌어야지 이러면서, 영치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사건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무기수의 수익구조


사건을 연구하고 자꾸 여기저기 편지를 날리며 자백 연극을 벌이는 가장 큰 이유가 ‘돈’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저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그 형이 주고받는 편지에 보면 ‘공적’이라는 말이 많이 나와요. 돈 줄 테니까 공적 좀 쌓게 도와달라는 편지가 많이 오더라고요. 그러면 그 형이 돈 먼저 줘, 영치금 먼저 쏴, 그러면 니가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그러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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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수사나 재판을 받는 사람이 수사기관에 협조를 하거나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면, 사건 해결에 기여했다며 ‘공적’을 인정해 주는 제도가 우리나라에도 있다.


그 정보가 본인 사건과 무관하더라도 다른 주요 사건에 도움 되면 공적을 인정해 준다. 외국에서는 플리바게닝이라고 부르는 이런 제도가 대법원의 양형기준에 명시되어 있다. 단, 마약사범들에게만 적용된다.


앞서 마약범 최씨(③편 참조)가 이진구의 편지를 훔쳐보고 이병주의 범행 내용을 알아낸 것도 이와 같은 공적 확보를 위한 작업이었다. 이진구가 죽자 이번에는 이병주가 또 다른 마약범들과 함께 공적 거래를 시작한 셈이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감빵 생활이라지만 간식을 사 먹거나 의복을 구매하는 데 쓰는 영치금이 없으면 거지 취급을 받는다. 영치금은 재소자들 사이에서 무시 안 당하고 편하게 수형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일종의 ‘품위 유지 비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이병주 입장에서 영치금을 얻기 위해 바깥의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사건밖에 없었던 셈이다. 자신이 저질러서 소상히 알고 있지만, 증거가 없어서 종결되지 않고 미제로 남은 사건은 수요자(수사기관)가 있는 만큼 거래하기에 적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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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미제사건의 범인이 자신이라는 정보를 마약범에게 팔고, 마약범은 경찰에게 그 정보를 주고 ‘공적’을 인정받아 형량을 줄이고, 마약범은 이병주에게 영치금을 넣어주는 ‘공적 거래’는 이렇게 완성된다.


심지어 명일동 사건이나 미아동 사건의 경우 2012년 검찰이 1차로 이 사건들을 다뤘을 때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덮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여전히 미제로 남아있었다. 그렇기에 이병주가 2018년 다시 ‘공적’으로 거래할 수 있었다.



살인 사건의
중고 마켓


이렇게 경찰과 범죄자 사이를 오가는 마약범들을 야당이라고 부른다. 돈이 좀 있는 마약범이라면, 형을 줄이기 위해 야당들을 이용해 눈에 불을 켜고 공적을 찾는다.


수요가 있으니 시장이 생기고 브로커까지 등장한다. 브로커들은 이병주처럼 결코 감옥에서 나올 수 없기에 살인 몇 개쯤 더 했다고 자백해도 달라질 바가 전혀 없는 인물을 섭외해서 사건을 가르치고 주인공으로 만든 뒤, 돈 있는 마약범에게 판다.


물론 이병주처럼 본인이 범인이라면 누구보다 내용을 잘 알고 있을 테니 가르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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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차는 것은 심지어 누가 한번 썼다가 버린 중고 공적이라도 사건이 미제 상태이고 디테일만 살아있으면 다시 팔 수 있다는 것이다.


관할이 다른 경찰서들은 서로 정보공유를 활발하게 안 하기 때문에, 중고 공적의 경우 다른 경찰서에 제보하면 된다. 경찰 입장에서는 갑자기 누군가가 오랜 미제 사건의 범인이라며 손들고 나오는데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병주는 본인이 저지른 사건뿐 아니라 사바이 단란주점 사건 등 다른 유명한 미제사건까지 자백하려고 했다. 사바이 단란주점 사건의 경우 사건일에 이병주가 수감 중이어서 범인이 되려야 될 수 없었는 데도 말이다.


02.jpg 사바이 단란주점 살인사건의 용의자 수배 전단지 (1998)


여기까지 알고 나니, 이병주가 온갖 자백을 했다가 번복하고, 혹은 자신이 안 저지른 사건까지 범인인 것처럼 털어놓는 이 모든 기획의 동기가 명확하게 보였다.


우리나라 사법 시스템 상, 이병주의 자백 연극은 그에게 명백한 경제적 이익을 주는 것이다.


자백으로 판을 열면 마약범한테 돈 몇백을 받을 수 있고, 뒤이어 형사들이 조사하러 오면 영치금도 몇 푼씩 받아먹을 수 있으며, 혹시나 미아동 사건처럼 기소되거나 재판을 받으면 청송교도소처럼 빡센 곳을 벗어날 수 있는 데다, 검찰청이나 재판정을 오가며 사회 공기까지도 맛볼 수 있으니 1석 4조쯤 되는 장사 아닌가.



영원한 봉인


이 비열한 살인범을 직접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을 내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직접 어떤 느낌의 인간인지 판단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렵게 면회신청을 넣고 날을 받아 대구교도소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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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무잡잡한 얼굴에 각진 광대뼈, 목격자의 말대로 정수리에 숱이 적은 짧은 머리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철창 너머 의자에 앉은 이병주의 덩치는 왜소했으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모든 행간에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다만 내가 대화의 마지막에 ‘정말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확신하는지’ 묻자, 우물쭈물하면서 “당시 약에 취해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황당한 대답이었다.


당신이 약에 취해있어서 사람을 죽여놓고도 기억을 잊은 건 아닌지 물었다. 그러자 스스로도 확신이 없다는 듯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러진 않을 것 같아요”라고 말끝을 흐렸다.




얼마 후 나는 이병주의 실체를 들여다보고 미아동 사건의 진실을 찾아보는 방송을 세상에 내보냈다. 부디 미아동 사건의 2심 재판에서 사건의 진실이 정확하게 다뤄지기를 기대하면서. 살아남은 피해자들이 행여 잡히지 않은 범인에 대한 공포로 또다시 과거의 어둠에 붙들려가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또한 어떤 순수한 열의를 가진 경찰관이 이병주의 노림수에 다시는 말려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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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년 후, 서울 모 경찰서 강력팀에서 나를 찾아왔다. 그알에서 다루는 사건과 관련해 수사기관을 만나는 일이 잦은 터라 무심히 만난 그들로부터 뜻밖에도 이병주라는 이름을 들었다.


이병주가 이번에는 새로운 사건을 자백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고 했다. 사람을 죽인 후 어느 산에 시신을 묻어놨는데 파보라는 얘기였다. 알려지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사건이었다.


경찰 입장에서는 이걸 파려면 엄청난 인력을 동원해야 하니 혹시 거짓이면 안될 터, 윗선에 보고하기 전에 이병주 말의 진위를 판단하는 중이었다. 이병주에 대해서는 가장 자세하게 탐구해 본 사람이 당신인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더 이상 이병주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그분들께 전해드렸다. 경찰서를 계속 바꿔서 편지를 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모든 것이 지난 십여 년간 그가 해온 행동 그대로였다.


피해자들의 한으로 남은 미제사건을 하나라도 더 해결하려는 수사기관의 의지를 방해하고, 지극히 사소한 이익을 얻고자 공권력을 농락하는 이병주. 두 번의 무기징역으로도 모자라 거듭 말로 범죄를 저지르는 그를 이제 그만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이병주에 대한 기록을 다시 남기는 이유다.


방송은 흘러가지만 글은 남으니까. 앞으로도 그는 잊힐만하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것이다. 시간은 남아돌고 써먹을 사건 또한 끝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내 바람은 모두가 이병주라는 이름을 잊는 것이다. 이글이 언제든 그가 일으킬 혼란을 잠재우고 영원히 그를 봉인하는 주문이 되기를 소망한다.☀





<자백의 늪> 총 7편을 마무리합니다.

① 2004년 괴담

② 검거작전

③ 마약범의 작업

④ 수수께끼 놀이

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⑥ 미아동 새벽 3시의 범인

⑦ 사건 상인 (끝)



Q 파일 : 우리 사회의 문제를 들여다본 기록을 전합니다. 이번 편은 <그것이 알고싶다> 1306회를 돌아보며 못다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모든 삽화는 midjourney로 직접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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