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인생 여섯 달. 쪽쪽에서 냠냠으로

뭐 하나 쉬운 게 없네

by 시애

아재 입맛, 할매 입맛, 애기 입맛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희귀 동물의 고기와 대단한 냄새를 풍기는 발효 식품(홍어, 취두부 등)을 빼면 가리는 음식이 거의 없... 으나 오이만은 너무 싫다! 진지하고 절실하게 싫다. 어릴 때 집에서 계속 쓰던 비누가 ‘오이 비누’였다. 비누 냄새나는 걸 왜 먹어? 마사지 재료 냄새도 난다. 오이는 얼굴 마사지할 때, 특히나 햇빛에 벌겋게 탔을 때 쓰는 게 아닌가. 얼굴에 붙여야지 그걸 왜 먹어? 맛은 수박껍질이랑 똑같다. 원래 수박껍질은 안 먹는 부위다.



그런 연유로 나의 이 가난한 상상력으론 떠올릴 수 없던 날이 오고야 말았다. 내 돈 주고 친히 오이를 사서 손질하는 날. 이유식을 먹여야 한다. 혼자 오이 냄새에 경악하면서 박박 씻어 껍질을 까고 씨를 긁어냈다. 잘게 썰어 푹 쪄서 익힌 후에 믹서기로 갈았다. 세상에. 무려 흐물흐물하게 익힌 오이라니. 이게 사람이 먹는 거라니.






아기가 태어난 지 바야흐로 6개월, 이유식 월드 오픈. 쉽지 않을 줄은 알았다. 조금은 기대도 했었다. 분유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유식은 맛도 색깔도 식감도 알록달록하니까 잘 먹을지도 몰라. 그랬으면 좋겠다.



이유식을 만드는 과정은 요리라기보다 공정에 가깝다. 재료를 산다 → 손질한다 → 익힌다 → 믹서에 갈거나 다진다 → 틀에 넣어 얼린다. 마지막 과정까지 마치면 ‘큐브’가 완성된다. 이유식 먹이는 시간에 냉동실에서 필요한 식품의 큐브를 몇 개 꺼내어(“오늘은 쌀이랑 소고기, 고구마, 새송이버섯 큐브를 먹여 볼까!” 하는 식) 데워 먹이면 된다. 이유식 책을 한 권 사서 거기 있는 순서대로 갖가지 재료를 사다가 큐브를 만들기 시작했다.



첫 번째 난관은 생전 처음 해보는 형태의 재료 손질이었다. 재료를 익혀서 갈기만 하면 되니까 만만하다고 여겼는데, 익히기 전에 손질하는 과정이 어른용 음식과 달랐다. 쌀은 g 단위까지 무게를 재어 물의 양을 정확하게 맞추고, 아욱은 푸른 물이 나오도록 치대어 이파리만 떼고, 토마토는 씨앗까지 제거하고, 닭 안심은 근막과 힘줄을 없애라고요?



그중에 제일은 ‘완두콩’이었으니, 콩을 물에 불리고, 삶고, 건져내어 믹서에 갈... 기 전에 콩쥐가 된 심정으로 완두콩 껍질을 한 알 한 알 손으로 까고, 다 깐 후에 믹서에 갈... 려고 했으나 여전히 딱딱해서 다시 삶고, 드디어 믹서에 갈면서 나의 멘탈도 함께 갈려 나갔다. 화룡점정은 그렇게 만든 완두콩을 줬더니, 얼굴이 벌게져서 “웩! 우웩!” 스킬을 발동한 아기. 덜 갈린 완두콩 덩어리가 기도를 막은 것인가! 119에 전화하고 하임리히법을 실시해야 할 때가 왔나! 다행히 아기의 호흡은 계속 괜찮았고, 잠시 후 경계를 풀고 이유식을 살펴보니 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 그냥, 맛이 없었구나.



두 번째 난관은, 예상했던 대로, 먹질 않는 것. 대신 분유를 보면 환하게 웃게 되었다. 얘야, 이제 분유를 줄이고 이유식 먹어야 할 시기인데 왜 이제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흐물텅하게 녹아내리는 오이를 먹느니 차라리! 그런 거겠지(끄덕).



입을 잘 열지도 않았지만, 어쩌다 몇 숟가락 떠먹이면 기어코 입 밖으로 꺼내 버렸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서 혹은 옷이나 의자에 침과 함께 잔뜩 묻혀서 또는 어떻게든 주르륵 퉤퉤퉤 뱉어서. 모른 척하고 더 먹이려 하면 호통을 쳤다. 흥애! 지금 이것을 먹으라고 가져온 것이냐! 당장 분유를 대령하라! 흥애흥애흥애! 우웨엑! 그러면 소고기 가루 폭탄이 터진 전장 가운데 앉아 눈물, 콧물, 이유식 범벅인 아기를 안고 분유를 먹이는 엔딩. 한 차례 이유식 대전이 끝난 후에는 모든 곳에서 곱게 갈린 소고기가 발견되었다. 눈썹 위, 머리카락 속, 발가락 사이, 겨드랑이, 냉장고 문짝.






세상에는 모유와 분유보다 맛있는 게 많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샤인머스캣 즙을 입에 넣어 주었다. 사과와 바나나도 갈아 먹였다. 단호박과 고구마를 이유식에 섞었다. 아기가 이유식을 합 합 받아먹기 시작했다. 이유식 먹이기 미션 성공. 대신 매일 고구마를 먹으려 든다(흥애! 지금 고구마도 넣지 않은 걸 먹으라고 가져온 것이냐! 우웨엑!). 이유식 골고루 먹이기 미션은 실패. 분유맛처럼 고구마의 맛을 이유식맛으로 받아들인 것일까. 요즘은 달큰한 양파나 양배추나 무로 아기를 속이려 눈치를 보고 있다.



하지만 힘을 내. 이만큼 왔잖아. 이것쯤은 정말 별거 아냐. 결국은 너도 하루 세끼 밥을 먹게 될 거야. 분유 대신 이유식과 유아식과 간식으로 배를 채우는 시기를 지나서, 온갖 재료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호불호를 만드는 경험을 넘어서. 천천히 함께 이유식의 시간을 지나가자. 천천히, 천천히. 괜찮아. 이건 엄청나게 기나긴 마라톤이고,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잔뜩 남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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