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18주 차. 아프니까 임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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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애

자취방 침대에 드러누워 책을 읽던 중이었다. 마침 소설 《7년의 밤》에서 댐의 수문이 열리는 장면이었다. 짧은 순간, 방이 통째로 흔들렸다. 소설 속에서는 댐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4D 효과 대단하네, 라고 생각하며 계속 책을 읽었다(왜!). 2016년 9월, 경주에서 규모 5.8의 지진이 나던 날이었다.



이듬해 11월, 포항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나던 날에는 오늘 재난 훈련한다더니 완전 실감 나게 하는구나, 요새 기술 대단하네, 하고 넘겼다(대체 왜!).



2023년 11월, 경주에 다시 지진이 나던 새벽의 나는 배가 아파 끙끙대던 중이었다. 배꼽과 왼쪽 골반 사이가 쿡쿡 쑤셨다. 다른 날은 잠깐 아프다 마는데, 그 새벽에는 유독 쿡쿡, 쿡쿡쿡, 쿠쿠쿡쿡쿡쿡... 그러다 세상이 부르르르 진동했다. 하아. 내가 지금 시야가 흔들리도록 아픈 거구나. 열이 심할 때는 눈앞이 빙빙 돌던데, 이번에는 좌우로 흔들리네. 날 밝으면 바로 산부인과부터 가봐야 하나.



머릿속으로 산모 수첩의 위치를 헤아려 보는 동안 충전해 둔 핸드폰에서 재난 문자 알림음이 들렸다. 진짜 지진인가. 이번에도 원인 파악에 실패했군(이 정도면 삼진 아웃). 병원은 안 가도 되겠네.





까마귀가 나는 순간에 배가 떨어진 건지, 아니 뗀 굴뚝에는 연기가 나지 않는 건지, 이 정도 연기는 무시해도 되는 건지 매번 판단이 어렵다. 입덧 말고는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을 통증들이 수시로 예고편을 보여주는데, 이번 건은 병원에 가야 하는 통증인가 아닌가 자주 고민한다.



배를 콕콕 찌르는 통증은 흔하다. 가끔은 옆구리를 푸욱푹 찌르기도 한다. 손가락 관절이 몸살 때처럼 아프기도 했다. 어느 날은 갈비뼈 부근이 저릿저릿했다. 근육처럼 주무를 수도 없고 난감했다. 피부가 화르륵 뒤집힐 수도 있다고 들었던 증상은 등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자다가 손발이 저려서 깨기도 했다. 허리는 임신 전부터 숨 쉬듯이 아팠고, 젖가슴은 당연히 아픈 거고, 매번 태만한 위장이야 말도 못 하겠다.



혹시 뭔가 잘못된 건 아닌지 겁을 집어먹은 채 '임산부' 뒤에 'OO 통증'을 붙여 검색해 보면 다들 거기가 아프다고 토로하고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죄다 '정상적인' 통증이라고 했다. 아픈데, 나는 분명히 아픈데, 이게 정상이란다. 어차피 약은 먹을 수 없고, 놀란 눈으로 산부인과에 뛰어가 봐야 정상이라는 말만 듣겠지. 고쳐야 할 아픔이 아니라는 것에 한시름 놓으면서도 고칠 수 없는 아픔이어서 외로웠다. 오롯이 나 혼자 견뎌내는 수밖에 없으니까. 참다 참다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어 아프다고 내뱉었다가는 임산부가 아프다는 말에 놀란 상대방을 도리어 달래야 한다.



무섭기도 하다. 오만 통증을 죄다 임신 때문이라고 눙치다가 중대한 상황에 이르고 마는 것은 아닐까. 임신 호르몬이 다른 질병을 죄다 철벽 방어하는 것도 아닐 텐데. 게다가 정말로 아기가 안 좋아서 아픈 상황을 ‘정상적인’ 아픔으로 착각해서 치료 시기를 놓치면 어쩌나. 통증의 원인이 뭔지 스스로 판단할 자격이 나에게 있는 걸까. 지진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울지마 바보야).







건강 상태창이 절실하다. 게임 캐릭터처럼 머리 위에 하나 띄워 놓고 나만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 배가 3만큼 아프군. 의사 선생님이 5만큼 아프면 오라고 했으니까 아직은 괜찮겠다. 지금은 철분이 부족하니 영양제를 먹어야겠어. 물도 2컵 더 필요해. 그런 거. 아, 진짜 좋을 텐데. 참아온 나날 힘겹던 날 다 연기처럼 멀리 사라져 갈 텐데. 허나 아무리 고개를 들어봐도 상태 바는 도통 보이질 않고, 별수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임산부’를 앞에 붙여 검색한다. 지금 이 순간의 통증은 정상인 건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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