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만난 할머니를 닮고 싶다.

- 멋진 할머니가 된 나를 처음으로 상상해 보았다.

by 코알라

지난주 대구의 날씨는 '이러다 봄인가?'싶을 정도로 따뜻했다.

아직도 '배송 중'인 새로 산 겨울 패딩을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하고 겨울이 가버릴까 살짝 걱정되었지만, 일기예보를 보니 비소식이 있는 금요일과 토요일 이후 다시 영하의 날씨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춥다는데 기쁘긴 처음이다.


금요일 아침, 프랑스 자수 수업을 가기 위해 준비하느라 아침부터 분주했다.

일기예보대로 바깥은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내딛을 때마다 방울방울 젖어가는 청바지까지 더해져 꿉꿉함에 찜찜함까지 더해졌다. 그래도 이 비만 견디면 새로 산 패딩을 입을 수 있단 생각에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강도 높은 자수 수업을 끝내고 나오니 비가 그쳐있었다. 비를 막아주던 고마운 장우산이 '짐'으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금요일, 그친 비... 이것만으로도 괜스레 설레어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지 않고, 교보문고가 있는 동성로로 향했다.


비가 내리는 평일 오전 시간대지만 교보문고엔 사람들로 붐볐다.

나는 곧장 내가 좋아하는 3층 인문학 코너로 향했다. 논어와 장자, 니체 등 인문학 서적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희한하게 인터넷에서 눈여겨보던 책을 사러 서점에 가놓고, 늘 다른 책을 사 오게 된다.

오늘도 장바구니에 담아 두었던 책을 한두 장 펴보다 그 옆에 있던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인터넷에서 책을 보는 것과 직접 서점에 가서 책을 보는 것은 느낌이 완전 다르니 서점을 자주 가보더라던 누군가의 조언이 서점을 좋아하는 나를 더 서점 죽순이로 만들어 주었다.

이 좋은 말을 누가 해줬었는지는... 아예 기억이 나진 않는다. 알려준 그 누군가는 참 억울할 일이다.




1권의 인문학 서적과 1권의 에세이 서적을 집어 들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러 내려가려는데 어떤 할머니가 나를 보며 입을 뻐끔거리셨다.

앗, 이어폰!

라디오를 듣고 있던 터라, 들리지 않았던 할머니의 말을 듣기 위해 왼쪽 이어폰을 빼며 내가 다시 물었다.


"네? 할머니 저한테 뭐라고 하셨어요?"

"지금 몇 시 예요?"

탱글탱글 뽀글뽀글한 단발머리의 할머니가 나에게 시간을 물으셨다.

할머니의 안경에 맺힌 물방울을 보고 있다 자연스레 오른쪽 어깨에 내려앉은 빗방울로 시선이 갔다.

'아, 비가 다시 오나보네.'


할머니의 남색 재킷의 빗방울이 스며들지 않은 걸 보니 방수 재질인가 보다. 다행이다.

털어드리고 싶었지만 그것까진 지나친 오버다.


"지금 1시 5분이에요."

"아. 1시 5분, 나 3시까지 집에 가야 되거든요. 고마워요."

"아하하, 그러세요?"

마침 휴대폰을 꺼내 들어 시간 확인했던 터라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부랴부랴 발걸음을 옮겨 내가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인문학, 철학 코너로 가셨고 찾고 있는 책이 있으신 듯 두리번거리며 책구경을 시작하셨다. 괜히 할머니의 동선에 눈이 따라갔다.




가끔 나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앞길을 막아서며 무턱대고 반말로 본인 말부터 하고 보는 어르신들이 간혹 계신다. 그럴 땐 내가 이 대답에 반드시 응해야 되는 의무가 있는 건가 고민될 정도로 기분이 언짢다.

하지만 나의 반대편 왼쪽 사선에서 나긋한 목소리를 내시는, 무례하지 않은 할머니의 애티튜드에 괜히 내 기분이 더 좋아졌다.


'어깨에 내려앉은 빗방울을 보니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오셨나 보다.'

'눈동자가 대개 맑으시다.'

'3시까지 가야 된다는 할머니의 말투엔 조바심보다는 신남이 묻어나시네.'

'책을 좋아하시나 보다. 젊을 때부터 즐겨보신 거겠지?'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할머니와 짧은 대화 이후 계산대로 향하는 내내, 할머니신상에 대한 별의별 생각을 해보다 할머니가 된 나의 모습까지 처음으로 상상해 보았다.


나도 서점에서 만난 할머니처럼 책이 보고 싶다면 지금처럼 언제든 책을 보러 서점에 올 것이다.

그리고 부득이하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남녀노소 그게 누구든 무례하지 않게 질문할 것이다.

이 두 가지 만으로도 꽤 멋진 할머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keyword
이전 09화토끼띠의 해, 어느 아저씨의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