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삼성물산 건설부문 From Bold P
마리오 보타, 작년 개봉한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 제목처럼 ‘영혼을 위한’ 건축의 대가다. 보타의 영적인 힘의 원천이자 현재 그의 작품까지 이해하기 위해선 스위스의 가장 남쪽으로 가야 한다.
붉은 지붕과 아치형 건축물의 고장
스위스 티치노 지방은 우리에게 꽤 생소한 지역이다. 이 주에 속한 대표적인 도시 하나를 꼽자면 국제영화제로 유명한 로카르노를 말할 수 있겠다. 스위스 가장 남쪽에 자리해 이탈리아와 국경을 접하는 티치노 주는 예부터 건축가의 지역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건축가들을 배출했는데, 그만큼 이 지역은 중세 로마네스크의 중후한 건축물이 곳곳에 남아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물론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된 몬테 산 조르조 산을 비롯해 수려한 자연 경관까지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이 세계 자연의 백미를 느끼기에 좋은 휴가지이기도 하다. 바로 이곳에서 마리오 보타는 태어나 자랐고, 현재까지도 40여 년 동안 그의 고향 멘드리시오에서 건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 때문에 티치노 지방은 보타의 건축물을 집대성해 놓은 박물관처럼 곳곳에서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CHAPTER 1. 세 명의 스승과 티치노라는 스승
나이 터울 많은 누나들과 어머니, 이모들이 사는 가정에서 미숙아로 태어난 보타는 어릴 적부터 가족들의 보호를 받으며 귀하게 자랐다. 여성이 많은 집안 분위기 특성상 그는 세상을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자연스레 터득했는데, 누추한 집안 부엌에서 속삭이는 담소와 비밀 얘기들을 함께 공감하며 모계 사회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그렇게 형성된 심미안은 그를 건축학으로 이끌었고, 가톨릭 학교인 베아토 안젤리코에서 그가 신에 대한 감수성을 키웠다면 베네치아건축학교를 통해 자신만의 기호를 섞은 건축 양식을 배웠다. 베네치아에서의 경험은 보타에게 엄청난 자산이 되었다. 이곳에서의 인연으로 보타는 파리의 르 코르뷔지에 건축사무소에서 작품을 연구하며 일할 기회를 갖는데, 중세 건축물을 자양분으로 삼은 청년에겐 모듈러 이론 같은 모더니즘의 기본을 충실히 배우는 귀한 시간이었다. 이후 다시 베네치아로 돌아온 보타는 두 번째 스승인 루이스 칸을 만난다. 1969년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칸이 설계를 맡은 베네치아 콩그레시 궁전을 건축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문제의 원인 너머로 볼 수 있는 능력은 루이스 칸이 내게 준 내게 준 가장 귀중한 교훈이었다”고 그는 훗날 칸과의 작업을 소회했다.
두 스승에게서 받은 값진 배움을 중심으로 보타에게 건축 철학의 방점을 찍어준 사람은 카를로 스카르파였다. 모더니즘 건축 이론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 모더니즘이 간과한 건축적 기본을 그는 짚어줬다. “콘크리트, 자갈, 흙처럼 아주 심플하면서도 서로 다른 재료를 사용하고도 최고의 결과물을 가져오는 사람”으로 기억하는 스카르파가 재료를 다루는 방식은 보타가 보기에 “물질의 승화”와도 같았다. 르 코르뷔지에로부터 설계 원칙을, 칸에게서 벽돌을 사용한 기하학적 설계와 빛의 관계성을, 스카르파에게서 재료의 물성과 그 표현법을 수혈 받은 보타는 이 모든 양분을 흡수해 발아시킬 자신만의 토양, 티치노로 돌아왔다.
CHAPTER 2. 티치노에서 보타 순례
그의 첫 작품은 당시 그가 다니던 교구의 신부가 의뢰한 ‘제네스트레리오의 사제관’을 짓는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함을 알아본 올리비에 신부는 당시 전혀 레퍼런스가 없던 젊은 건축가를 적극 지지했다. 사실 이 작품을 보면 보타의 최근 프로젝트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붉은 벽돌과 기하학적인 디자인이 돋보여, 초기 경력부터 잘 다져 놓은 그만의 견고한 건축 철학을 다시금 실감하게 만든다. 부지의 언덕을 깎아내지 않고 지형적 특성을 살려 사제관다운 엄숙한 분위기의 공간을 마련하되 돔 형태의 시계탑을 세워 중세적인 고풍스러움도 놓치지 않았다. 회색의 석회벽과 석회에 돼지 피를 섞어 붉은 갈색으로 반죽한 벽돌을 용도에 따라 사용하는 방식은 티치노 지방의 오랜 가옥 건축 양식으로, 보타는 콘크리트 블록을 사용해 전통적인 방식을 다시금 재현한다. 이런 특징은 1976년에 작업한 ‘리고르네토의 집’에도 잘 반영돼 있다.
첫 작품이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 멘드리시오에 보타의 건축사사무소가 있다. 리고르네토의 집은 사유지이므로 접근이 어렵지만 보타의 사무실에 있는 ‘푸오리포르타 빌딩’은 외관이 다소 리고르네토의 집과 중첩되는 지점이 있어 둘러보기 좋다. 요르단 트래버틴 소재를 사용해 모더니즘 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사무소가 있는 건물의 로터리를 끼고 맞은편엔 보타가 설계한 ‘멘드리시오 치안 센터’ 건물이 위치한다. 기존 소방서를 새롭게 리노베이션한 프로젝트로 거대한 원형 광장은 소방관들의 훈련소로 이용되는데, 직선과 원형, 사각형 등 도형의 리듬감이 누가 봐도 보타의 디자인임을 눈치챌 수밖에 없다. 두 개의 커다란 보타의 작품이 있는 이 일대에 서면 비로소 보타의 구역에 들어섰음을 새삼 깨닫는다.
“매일 30명의 직원들의 책상을 다니며 수정을 반복해 개인 책상이 서른 개 있는 것과 같다”는 보타의 사무실을 떠나 본격적인 보타 건축 순례를 위해선 루가노를 거쳐 라비짜라 계곡을 지나야 한다. 몬뇨의 작은 마을의 교회를 짓는 일은 보타에게 종교적 소명을 다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350년의 역사를 지닌 교회가 눈사태로 한순간에 사라지자 그는 ‘산 지오반니 바티스타’를 다시 닥쳐올 재난에서도 버텨내도록 두꺼운 돌벽을 굳건하게 쌓아 올렸다. 원통 기둥을 비스듬하게 잘라낸 듯한 단면의 원형 천장은 가벼운 유리 소재로 마감해 내부로 빛이 들어올 수 있게끔 조절했다. 이렇듯 단순한 도형을 활용한 설계에 대해 그는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며 “인간은 내부 공간과 익숙해짐과 동시에 거주가 시작된다”는 정의를 곁들였다. “간단한 형태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며, 이것이야말로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 사이의 관계를 가장 손쉽게 형상화하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건축 특징을 설명했는데, 또 다른 이유로는 “단순한 형태로 기념비성을 전할 수 있고, 단순한 형태의 건축물을 통해 풍경과의 관계가 강화되며 이는 도형의 단순성이 건축과 자연의 차이를 강조”하므로 도형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지역성과 풍경, 건축물의 관계를 보다 면밀히, 압도적으로 느끼고 싶다면 로카르노 근처 타마로 산의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교회’에 꼭 가보길 권한다. 전체 산을 조망하는 전망대의 기능을 하면서 지형을 해치지 않은 어우러짐, 그러나 결코 자연에 묻히지 않는 독자적인 건축물의 존재감을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 이는 “자연스러운 형태와 이성적인 구조를 대조함으로써 풍경의 새로운 힘을 발견하는” 보타만의 건축적 특별함이다.
공장이나 은행 건물 설계보다도 성지 건축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건축가, 마리오 보타는 이후 이스라엘의 유대교 회당과 중국 인촨의 사원, 한국의 남양 성모성지 대성당 등, 국가와 종교를 초월한 영적인 공간들을 설계했다. “신에 대한 저의 믿음은 매우 개인적이며 신비롭죠. 하지만 일에 대한 믿음과 영적인 믿음을 혼동해서는 안 돼요. 기독교 교회든 유대교 회당이든 혹은 어떤 종교적 건물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건축에 대해 굳게 믿어야 해요.” 개인의 종교를 넘어서는 건축에 대한 믿음, 건축가라는 길을 걷는 성직자의 신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