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를 감내하지 못한다면 승리의 영광 또한 온전히 누리지 말 것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야구를 좋아했다.
해태 타이거즈의 열렬한 팬이셨던 아버지는 이종범 선수가 일본 생활을 마치고
국내로 복귀한 2001년부터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저녁에 야구를 보셨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야구가 가까운 학생이 되었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 이후 K리그의 역대급 흥행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은 축구보다 야구가 더 우선이었다.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부산으로 직관도 많이 가고, 정말 야구를 많이 봤던 시절이었는데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자리 박힌 두 가지 장면이 있다.
여느 평범한 저녁, 아버지는 그날도 어김없이 야구 경기를 보고 계셨다.
당시 기아가 경기 초반부터 대량득점에 성공하면서 스코어가 10 - 1까지 벌어졌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경기가 길어졌고 나는 경기의 끝을 다 보지 못하고 먼저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아버지가 흡사 앓아 누워계셨다. 알고 보니 10 - 1로 앞서던 기아는 그날 경기를 10 - 13으로 역전패당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아마 그 당시 최다 스코어 역전패 기록이었을 것이다. 점수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는데 상대팀은 당시 현대 유니콘스였다. 그러고도 아버지는 그날 저녁 야구를 보셨고, 다행히 기아는 전날의 패배를 설욕했던 것 같다.
그리고 2003년의 어느 주말, 우리는 롯데와 기아의 경기를 직관하게 위해 사직구장으로 향했다.
금요일 경기가 우천으로 취소되어 토요일 날 두 경기가 치러졌고, 그다음 일요일 경기까지 진행이 되어
2일 동안 3경기가 진행되는 강행군이었다.
우리는 어쩌다 보니 그 3경기를 모두 보러 가게 되었다. 아마 토요일만 가는 것이었을 텐데, 그날 2경기를 모두 승리하여 그 흥에 도취된 아버지가 일요일 경기도 예매해 버렸던 것 같다. 왜냐면 일요일 경기는 기아 응원석이 아니라 롯데 응원석에서 보게 되었기 때문.
지금은 롯데뿐만 아니라 모든 팀 경기를 예매하기 어려울 정도로 프로야구의 흥행은 엄청났으나,
앞서 말했던 것처럼 2003년은 아직 전년도 월드컵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야구보다는 축구를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설상가상 롯데는 당시 17연패를 할 정도로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결국 일요일 경기도 기아는 앞서나가고 있었고, 7회가 되었을 무렵 꽤나 큰 점수차로 앞서고 있어서 사실상 기아의 승리가 확실했을 때. 기아 선수가 2루타를 쳤고 나는 큰 소리로 환호를 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가 나를 제지하셨다. 깜짝 놀라 주변을 돌아보니 저 윗 자석 즈음에 앉아계셨던 롯데 팬 분들, 술이 얼큰하게 취해계신 아버님 들이셨는데 그분들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물론 경기가 끝날 때까지 그분들은 우리에게 해코지를 하지도 않았고, 선수들에게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술을 드시면서 그 자리를 지키셨다. 그때는 그 아저씨들이 무섭다고만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얼마나 경솔했나 반성하게 된다. 우리 팀의 승리가 간절한 만큼 상대 팀에 대한 예의도 중요한 것이거늘.
결국 모두가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나는 야구가 아닌 승리에만 집착했었고, 아버지는 나에게 예의를 알려주셨다.
이 무렵이 지난 이후 사실 아버지와 야구를 보러 간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나는 나대로 계속 기아를 응원했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같은 팀을 응원하는 친구/선배들과 직관도 종종 갔다. 회사 사람들도 '야구 좋아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을 정도로 기아에 대한 팬심을 열렬히 드러냈다.
그런데 내가 마지막으로 기아 경기를 보러 간 지 3년이 다 되어가는 것 같다. 코로나 이전이 마지막이니까, 사실 팬이라고 하기도 민망하다. 시간이 없어서도 아니고, 거리가 멀어서도 아니다.
패배를 마주하기가 두렵다. 1년 144경기를 하는 장기 레이스에서, 한 번은 지고 한 번은 이기는 것이 확률이거늘 내가 어쩌다 한 번 보러 간 경기에서 내가 응원하는 팀이 진다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았다. 그것을 애정과 열정으로 포장했지만 어쩌면 제일 비겁한 팬심이었다.
패배를 감내하지 못한다면 승리의 영광 또한 온전히 누리지 말 것. 전날 10점 차 리드를 날리고 역사적인 대역전 패를 당한 팀을 그다음 날에도 굳건히 응원하는 마음. 그러면서도 상대 팀의 패배에 공감하면서 환희의 순간을 한 번은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
내가 야구를 좋아했던 그 시작을 잊지 말자. 물론 나는 내일 또 우리 팀의 패배를 지켜보지 힘들어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원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