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입은 옷과 신발, 타고 온 자동차, 그 차가 빠져나온 집. 그 집에 사는 가족 구성원, 그들과 그녀의 관계. 모든 것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샤워실로 입장한다. 수영장에 입수하기 전,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는 것은 필수다. 강력한 수압의 물줄기에 바깥세상의 온갖 시름이 씻겨내린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뚱어리는 태초의 그것과 비슷한 자유를 느낀다. 다 벗고 마주하는 너와 나는 평등하다.
그러나 그녀가 수영복을 장착하고 물속으로 들어가면, 전쟁은 시작된다.
공공기관의 수영 강습은 수준별로 초급/중급/상급으로 반이 나뉜다.(연수반 같은 것도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다닌 센터들은 없었다.) 레일별로 이미 우리의 계급은 정해진다. 또 그 안에서도 첫 스타트를 끊는 사람부터 맨 끝에 서는 사람까지 순번도 결정된다. 초급반에서는 눈치껏 자연스레 배열이 된다. 매달 초 신규 수강생이 들어오면 "수영 완전 처음이신 분"들은 발차기나 호흡부터 시작해야 하므로 분리가 되게 마련이다.
중급반에 들어와 보니 여긴 더 살벌한 곳이다. 첫 대면 시 강사가 일단 기초 영법인 '자유형'으로 25m+25m를 갔다 오라고 했다.(일반적인 강습용 수영장의 레일 길이는 25m. 반대쪽 벽을 턴해서 돌아오면 50m가 된다.) 그러고 나서 강습생 별로 앞뒤를 조정하며 순서를 정리해 주었다. 사실 이건 당연히 필요한 부분이다. 1번으로 출발하는 사람부터 앞으로 쭉쭉 나가주어야 중간에 막힘 없이 수업이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또 굉장한, 이놈의 서열은 심지어 나를 울게까지 했다. 또 내가 이를 악물게 만들었다. 처음 목표는 호텔 수영장에서 한가로이 배영이나 하는 걸로 시작했지만, 레일 안에서 스포츠 정신을 흡수해 버린 것 같다. 매너를 갖추되 기량을 꾸준히 갈고닦는 것. 내 체력과 기록의 한계를 넘어 더 나은 수영을 하고자 하는 욕망이 나를 계속 물속으로 끌어들인다. 내가 잘 되지 않는 이 동작을 잘하는 저 사람을 보면서 자극을 받고, 안되던 것이 되어 갈 때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결국 수영장에서의 서열은 건강한 경쟁이다.
사실 나는 현재 중급반에서 끄트머리에 선다. 연속으로 몇 바퀴씩 돌면 헉헉거리며 죽을 것만 같다. 하지만 죽기 살기로 또 출발한다. 꼴찌는 두려운 게 없다.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았으니 그냥 열심히 할 밖에. 내 왼쪽으로는 초급반에서, 오른쪽으로는 상급반에서, 또 더 떨어져 있는 자유수영 레일까지 오늘도 가뿐 숨을 몰아쉬는 그대가 위너(winner)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