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늦게 까지 일하고 퇴근하면 위험하지 않아요?"
내 마음을 흔든 건 한 마디였다. 이 일을 하면서 피곤하겠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어도 위험하겠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그래 맞다. 나도 여잔데 새벽에 퇴근하면 위험할 수도 있지. 택시기사가 추파를 던질 수도 있고 술 취한 사람이 말을 걸거나 뒤따라올 수도 있고 나쁜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해치려고 할 수도 있고. 물론 그런 마음을 먹기엔 내가 쉽게 도전할만한 타깃이 아니지만, 아무튼 왜 그런 생각은 못 했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그 말 한마디 때문에 그와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 이유가 컸다.
연하는 처음이었다. 아니, 그와는 많은 것들이 처음이었다. 그동안에는 낯부끄러워 이름 붙이지 못했던 사랑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를 느끼게 해 준 것도 처음, 남자 친구의 친구를 본 것도 처음, 결혼을 생각한 것도 처음이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꽤 많은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니 남자 친구와 싸운 것도 처음이었다. 이전 관계에서 나는 늘 쏘아붙이기 바빴고 그럴수록 상대방은 입을 다물었다. 화가 나서 큰 소리를 내도 대답 없는 메아리로만 돌아왔고, 싸우려 들어도 그들은 동굴로만 피해 다녔다. 그런데 그는 나와 같이 싸웠다. '이건 아니다. 그건 오해다. 그래서 그랬다.' 등등 침묵보다는 대화를 원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서 생긴 마음고생도 처음이었다. 한 성질 하는 나와 맞서서 싸우는 남자라니.
어느 날 저녁, 그는 갑자기 회사를 그만뒀다고 했다. 회사의, 아니 정확하게는 사장의 부당한 행동을 못 견디겠다는 게 이유였다. 직장인 중에 좋아서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볼꼴 못 볼꼴 다 봐가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아침마다 출근하게 되는 게 직장인들 아니었나. 어쨌거나 그는 갑자기 그렇게 그만둬 버렸고 나에게 통보했다. 당황했다. 거기까지였다. 아내도 아니고 기껏 여자 친구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래? 이유가 있겠지 잘했어 그래도 다음엔 미리 얘기 좀 해주라'였다.
그는 금방 다른 일을 구했다. 어느 높으신 분의 수행기사였다. 그는 경호학과를 나와서 석사과정을 밟는 중이었다. 경호원 일을 한 적도 있는 그는, 5분 대기조처럼 사는 삶이 싫어 교수가 되겠다고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수행기사라니. 그는 또 한 번 나에게 통보하면서 연락이 좀 힘들어질 거라고 덧붙였다.
그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어느 날, 그는 벚꽃이 만개한 길을 찍어 보냈다. 높은 분을 모시고 간 곳에서 그분을 기다리며 찍어 보낸 사진이었다. 아무나 못 들어오는 곳이라 관리가 잘 되어있다고 했다. 분명 예쁜 길이었다. 그런데 그 사진을 받고 씁쓸했다. 왠지 모를, 뭐라 말로 설명 못 할 그런 기분이었다.
그때 알았던 것 같다. 그의 미래에 내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는 걸. 교수를 하고 시의원을 하겠다는 그의 거대한 인생계획 안에 나는 없다는 걸. 나는 내 직업까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란하던 중이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각자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거란 걸.
그와 함께 한 마지막 봄이었다.
그와 만나기 훨씬 전, 이별 후유증을 겪을 때 누군가 그랬다. 상대방과 함께 했던 시간만큼, 딱 그만큼 시간이 지나야 잊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 급하게 마음먹지 말라고 말이다. 그런데 벌써 헤어진 후로 몇 번의 봄이 지나고, 벚꽃이 수없이 다시 피고 질 때까지도 곧잘 그를 떠올리는 나는 뭐란 말인가. '그만 잊어야지, 이제는 지워야지, 이 정도 했으면 됐잖아.'라고 생각하지만 무슨 꽃이든 다시 피면 그를 떠올리지 않을 방법이 없다.
꽃이 피면 당신을 잊겠다고 말한 시인이 있었다. 올 봄에도 그 시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한여름을 앞둔 지금까지 이 모양 이 꼴이다. 여전히 닮은 사람을 보면 놀라고 사소한 물건들로 그때를 떠올린다. 이렇게 오래도록 누군가를 잊지 못한 적이 없는데, 마지막까지도 그는 또 '처음'이다.
꽃이 피면 너를 잊겠다 - 한옥순
꽃이 피면
잊어야겠다
사방천지 흐드러진 꽃에 홀려
혼이라도 빠진다면
그때엔
너를 잊을 수도 있겠다
청춘의 빛으로 물든 꽃을 보면서
젊은 날 내 흰 치맛자락에
치자 꽃물로 물들던 너를
기어이 잊어내고야 말겠다
모진 겨울 다 이겨냈는데
모진 네 생각쯤이야
못 이기겠느냐
못 이겨내겠느냐 말이다
꽃이 피면,
꽃을 꺾어 놀다 보면
꽃이 지듯
나도 너를 반쯤이야 잊어가질 않겠느냐
청춘아, 붉디붉던 내 청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