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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May 24. 2024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생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기 앞의 생> 265쪽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본 1970년대 파리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열 살인 줄 알고 살았던, 원래 나이는 열네 살인 아랍인 모모다. 아이의 나이가 네 살이나 달라진 채로 살 수 있었던 것은 1970년 파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하다. 자신의 출생에 대한 궁금증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당시 고아들을 대변하는 듯한 모모. 그 당시 길거리에는 모모와 같은 고아들이 많았고, 그들의 출생은 대부분 이름 모를 창녀의 자식들이었다. 포주가 버젓이 매춘업으로 돈을 벌었고, 모호한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며 아이들도 마약에 손을 댈 수 있었고 프랑스 식민지에서 이주해 온 이민자들이 열악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 모든 것이 파리 빈민가의 1970년대 생활상이었다.


열 살 혹은 열네 살의 시선으로 파리 빈민가의 생활상을 그리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다. 아이의 순수함으로 어둡고 침울한 모습들을 때론 밝고 때론 유머를 담아 표현해 낸다.


"로자 아줌마가 초인종 소리에 놀라서 허둥대는 모습은 정말로 볼만했다... 우리가 배꼽을 잡고 얼마나 웃었던지, 보지 않고는 모른다(69쪽)."


"저능아란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자라지 않기로 마음먹은 아이다(135쪽)."


"자연은 노인들을 공격한다. 자연은 야비한 악당이라서 그들을 야금야금 파먹어간다(179쪽)."


"사람들은 모두 헤로인을 '똥'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러는 통에 똥 주사를 맞으면 기분이 끝내준다는 소시를 들은 여덟 살짜리 꼬마 녀석이 신문지에 똥을 눈 뒤 정말 그것으로 주사를 맞고 죽어버린 것이다(264쪽)."


유태인인 로자 아줌마가 초인종 소리만 들으면 독일군이 자신을 잡으로 왔다고 착각해 놀라 자빠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 빈민가의 저능아들을 보며 하는 생각 그리고 죽음을 향해 늙어가는 노인들을 바라보는 시선. 아이들도 무차별하게 마약에 가까이 갈 수 있었던 당시를 어이없는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면서.




이런 사랑도 있다


로자 아줌마는 모모와 같은 아이들을 그들의 이름 모를 부모에게서 돈을 받아 돌보며 살아간다. 과거에는 매춘업을 해서 살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늙어 빠져 그 일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지금은 자신과 같은 일을 했던 여자들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돌보는 아이들 중 한 명인 모모. 모모는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다. 모모에게 로자 아줌마가 각별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서로는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생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고아인 자신을 지금까지 키워준 것에 대한 고마움뿐만 아니라, 모모는 그녀를 생을 살아가는 동지로서 생각하고 인간적인 사랑을 한다. 점차 죽음에 가까이 가는 그녀를 옆에서 보살핀다. 영화 필름이 되감아지는 모습을 우연히 보고는 로자 아줌마의 병세가 필름처럼 되감기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하면서. 더 늙지 않게 더 죽음에 가깝지 않게 나와 함께 더 살아갈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와 함께. 심지어 모모는 이다음에 커서 로자 아줌마와 같은 쓸모 없어진 늙은 창녀를 보살피는 포주가 되겠다는 다짐까지 서슴없이 하게 된다. 가장 힘이 센 사람이 되어서 불쌍한 사람들을 돕겠다고...


"나는 늙고 못생기고 더 이상 쓸모없는 창녀들만 맡아서 포주 노릇을 할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경찰과 포주가 되어서 엘리베이터도 없는 칠 층 아파트에서 버려진 채 울고 있는 늙은 창녀가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153쪽)."



정신이 켜졌다 꺼졌다 하는 도중 로자 아줌마는 모모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을 건넨다.


"모모야, 항상 명심해라. 엉덩이는 말이다, 사람이 가진 것들 중 가장 신성한 것이란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야...(155쪽)"


자신은 이곳에서 이렇게 밖에 살 수 없었으나 너는 절대 그렇게 살아선 안 된다, 네가 겪고 봐왔던 세상이 유일한 세계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는 세상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모모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던 것에서 모모에 대한 로자 아줌마의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었던 장면이었다.




생과 죽음, 죽음과 생


모모는 어느 순간 깨닫는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서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152쪽)"라고.


오래된 사진 속 젊은 시절의 로자 아줌마의 모습을 보고서 모모는 생이란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자신 앞에 있는 생에 대해서. 생이 서서히 끝나고 죽음에 다다를 때 과연 그것은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한다. 열네 살의 아이는 이미 생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로자 아줌마의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서 생이란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팽팽했던 젊음이 어느덧 겉가죽이 쪼글해지듯 볼품없이 변해가는 인간의 운명, 그리고 그 끝은 죽음뿐이라는 숙명을 인지하면서.


반면 어떤 생을 살았느냐에 따라 죽음에 다다른 모습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말이다. 엉덩이를 빌어 먹고살았던 그녀의 모습은 혹은 그곳의 'les miserable(불쌍한 사람들)' 그들 위에 생이 지나간 모습은 아마 로자 아줌마의 마지막과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럼에도 생은 마땅히 이어저야 함을 모모는 느꼈다. 로자 아줌마의 죽음은 그에게 곧 홀로 섬이고 의지할 세계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니까. 로자 아줌마의 눈물, 똥오줌, 그리고 지독한 내장 기관의 썩어가는 냄새조차도 그것은 그녀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니 모모는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les miserable' 즉 불쌍한 사람들에게 죽음은 생에 대한 구원일지도 모른다. 다른 말로 생은 곧 죽음일지도 모른다. 생은 고통이고 지옥. 그들에게 생의 주체는 자신이 아니었고, 언제 어디서나 그들은 소외되었다. 사회에 소외되고 타인에게 소외되고 심지어 자신에게도 소외된 삶을 살았다. 그렇기에 생을 끝내는 죽음이 곧 구원이고 다시 태어남일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 구원받는 삶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중절수술을 받지 못했는데, 그땐 그것이 계획적인 살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로자 아줌마 곁에 앉아 있고 싶다는 것. 적어도 그녀와 나는 같은 부류의 똥 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256쪽)."


당시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고,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생이란 것이 주어졌으니, 생이 주어지지 않은 이 '불쌍한 사람들'은 그들끼리 의지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로자 아줌마와 모모, 하밀 할아버지와 모모, 의사 카츠 선생님과 그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돕고 도와주며 지냈던 불쌍한 사람들. 그들의 생은 고통스러웠지만 서로에게 충만했다. 그들의 생은 소외되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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