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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May 31. 2024

고독은 고독으로, 슬픔은 슬픔으로, 사랑은 사랑으로

<여자의 빛> 로맹 가리

“감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삶은 사랑하는 이의 입술 맛과 가장 가깝소”

<여자의 빛> 125쪽


난파자 두 사람


“난파자 두 사람에게 남은 것으로는 높은 파도를 이길 배를 만들기 어렵다는 걸 나도 안다오.” (69쪽)

이 소설 속에서 두 남녀는 난파자와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있다. 잃고 있다라는 말이 논리적으로 모순이지만, 이 소설 안에서는 가능하다.

한 남자는 자신의 아내가 죽기로 결심한 날, 우연한 기회로 낯선 다른 여자와 함께 있게 되고, 그 낯선 여자 역시 얼마 전 딸을 잃고 방황 중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둘은 인생의 비극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서 난파되어 불행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난파자임이 자명하다.

슬픔은 슬픔을 알아보고, 고독은 고독을 응시하는 것이 운명이란 것인가. 나의 유일한 슬픔과 고독이 너의 유일한 슬픔과 고독을 만나게 되는 장난 같은 운명. 아내의 죽음을 애써 외면하고 먼 나라로 떠나기로 마음먹은 미셸은 택시에서 내리며 우연히 라디아와 부딪치면서 그들의 유일해 보였던 슬픔과 고독은 상대의 손을 잡는다. 사실 둘의 만남이 운명이든 장난이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들 모두에게 중요해 보인다.

불행을 온몸에 두르고 서로의 몸과 남은 시간을 공유한다. 남자에게는 그 시간을 견딜 누군가가 필요했고, 여자에게는 그 시간을 잊을 누군가가 필요했다. 사랑이 아닌 사람이 곁에 필요했을 것이다. 사랑이 아닌 생물학적 이성이 곁에 필요했을 것이다. 대체 불가능한 사랑의 힘을 인간의 욕망과 광기로 희석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두 난파자의 힘겨운 시간을 서로가 서로를 껴안으며 잊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두 난파자는 알고 있다. 그 둘이 힘을 합쳐도 결국 생의 거대한 파도를 넘길 배를 함께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사랑은 사랑을 낳길, 불행을 낳지 않고서


미셸은 항공사 조종사로 십수 년을 근무했고, 아내는 승무원이었다. 둘은 오랜 기간에도 서로의 사랑에 의심 한 점 없이 서로를 사랑한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어떻게 여전히 흠 없이 처음 같지? 모든 게 퇴색하고, 모든 게 깨지고, 모든 게 진력이 난다고들 하던데…”(41쪽)

그러다 아내는 죽을 병에 걸리게 되고 그들의 사랑은 불행의 옷을 입는다. 하지만 아내는 끝까지 사랑의 모습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미셸에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 심지어 죽음을 결심하면서.

“내가 당신에게 남겨놓은 걸 그 여자에게 줘… 나는 온 마음으로 바라. 당신이 부디 그 여자를 만나기를, 그 여자가 와서 우리 두 사람 안에 있는, 도저히 죽을 수도 없고 결코 죽어서도 안 될 그 무엇을 구해주기를. 그건 나를 잊는 게 아니야… 불멸에 대한 긍정이라고. 그 긍정이 당신을 도와 불행의 기를 꺾어야 해…”(25쪽)

아내는 진심으로 남편의 행복을 바란다.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 절대 불행의 옷을 입고 살아가지 말라며, 사랑하는 어떤 여자가 나타나 꼭 자신의 남편을 구하기를 바라면서. 자신을 사랑했던 그 빛으로 그 마음으로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나를 사랑한 만큼 더욱더 다른 여자를 사랑하기를 바라면서.

사랑도 그런 걸까. 해 본 사람이 더 잘하는. 찐 사랑을 한 사람만이 사랑을 알고 그래서 그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며 그렇기에 아내는 죽음을 앞에 두고 사랑하는 남편에게 당부한 것일까. 더는 죄책감 느끼지 말고, 더는 불행에 생을 맡기지 말고, 더는 슬퍼하지 말라고.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그것이 곧 자신과의 추억과 사랑이 남편의 마음속에서 불멸하는 일이기도 한 것처럼.

아내는 자신의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낳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불행으로 끝나길 바라지 않는 죽음 앞의 사랑.

사랑은 사랑을 낳길, 불행을 낳지 않고서.

여자의 빛


“나를 한 남자로 만드는 모든 것이 한 여자 안에 있었다.”(36쪽)


“여성성이라는 모국을 잃은 사내가 거울 속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당신의 샘, 당신의 하늘, 당신의 밭, 당신의 과수원을.”(38쪽)

미셸에게 아내는 이런 여자였다. 자신을 남자로 만드는 모든 것이자 내가 속한 세계의 모든 것. 샘이자 하늘 밭 그리고 과수원. 마치 마르지 않는 물이 샘솟는 원천이랄까. 부모는 아이의 우주라는 말이 여기서 나는 왜 떠오를까. 엄마 잃은 아이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은 내가 현재 내 아이의 엄마여서일까. 남자에게 여자는 이런 존재라는 뜻일까. 어둠 속에 환히 비춰오는 빛과 같은 존재. 엄마의 대체는 아니겠지. 진정한 사랑의 빛은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질까.

리디아는 아이를 운전 사고로 잃고 방황 중이었다. 그 사고의 책임을 아이를 태우고 운전했던 남편에게 씌우는 것도 덧없는 일이었다. 남편은 그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려 종일 틀어박혀 지낸다. 사랑이 언제부터 식은 것인지, 혹은 증오와 원한으로 사랑이 변질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남편 옆에는 다행히 시모가 아들을 보살핀다. 마치 사랑이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불행을 습관처럼 받아들이는 시모가 리디아는 불편하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마음과 자식을 잃지 않은 어미의 마음이 미묘하게 대조를 이룬다. 리디아는 시모에게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런 와중에 리디아는 우연히 미셸을 만나 하룻밤을 보내게 된 것.

“결핍감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순간 서로를 도왔을 뿐이다. 우리는 둘 다 망막을, 쉴 만한 굴을 필요로 했다. 허무로 가득 찬 우리의 봇짐을 들고 더 멀리 가기 전에.” (26쪽)

리디아가 미셸의 아내가 바랬던, 남편의 또 다른 사랑인지는 알 수 없다. 우연히 만난 관계가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는 시간이 말해주고 세월이 말해주므로. 각각의 불행을 입은 두 남녀가 그 불행의 옷을 기꺼이 벗고 서로의 사랑을 껴안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덧입혀진 순간의 감정과 행동을 사랑으로 부르기에 두 난파자는 더 오랜 방황의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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