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술에 넘어가야만 하는 운명
눈 한쪽을 반쯤 뜨고 한껏 얼굴에 주름을 만들어 가까스로 방을 나섰다. 평소대로 식탁 조명을 켜고 식탁 의자에 걸려 있는 보슬보슬한 핑크색 털 옷을 입었다.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서.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식탁 위에 켜켜이 쌓여 있던 빨간색 네모난 그것들을. 아니다, 슬쩍 보고 지나쳤을지 모르겠다. 어서 커피물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알면서도 무심했을지도 모르겠다.
털옷 덕분에 몸이 한결 따뜻해졌다. 진한 커피를 내리면서 시선은 잠시 그리로 가 있었나 보다. 커피를 내리는 내 얼굴에 미소가 실실 새어 나왔으니. 브라질과 콜롬비아산 남미의 뜨거움이 가득한 커피콩의 고소한 향 그리고 희미하고 잔잔한 미소.
다행이다, 고맙다는 말을 눈 맞추고 얘기할 수 있어서. 새벽형 인간인 남편의 형체를 직접 마주하려면 나도 함께 새벽형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말해 뭐 할까.
"여보, 이 빼빼로 뭐야?"
이렇게 물으면서도 사실 어디에서 받아왔나 하는 의심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안형에다 의심 많은 나의 성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어젯밤 회식의 진한 냄새가 이 새벽까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내가 어제 편의점에서 샀지” 라며 인상 한가득 쓰린 속을 문질러댔다. 그러고는 꿀물을 한 잔 들이켰고, 깎아 놓은 단감 하나를 씹어 먹었다.
직접 사 왔다는 말에 자연스레 내 입꼬리가 올라가 괜스레 시선을 떨궜다. 양볼이 이내 내가 입고 있는
털옷의 빛깔을 닮아가고 있었고. “진짜?!”
빼빼로 데이가 며칠 지나 있었고, 그동안 나는 아이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이런 날들은 그런 상품을 파는 그런 회사의 상술이라며, 우린 그렇고 그런 상술에 넘어가지 말자고. 굳이 그런 날이 아니더라도 사 먹고 싶을 때 사 먹는 게 현명한 소비라는 내 생각을 아이에게 주입하면서.
실은 아이가 더 어린 시절, 매해 11월 11일, 아몬드가 쏙쏙 박혀 있는 길쭉길쭉한 초콜릿 과자를 너 하나 나 하나 사 먹으며 아이에게 왜 오늘 이걸 먹는지 주입하던 순간들은 다행히 아이의 기억에서 사라진 듯 보였으니, 이제는 제대로 된 생각을 주입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더 실은, 혹여나 어느 미래에 아이에게 여자 친구가 생겨 이런 상술에 홀라당 넘어갈까 봐.
어찌 됐든, 이 빨갛고 네모난 각진 상자 4개를 보고 새벽부터 미소가 저절로 새어 나왔다는 건 여전한 사랑을 표현한 남편의 마음 때문이지 않았을까. 같은 말이지만, 이 남자가 상술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속상할 뻔한 옹졸한 내 마음 때문이었기도 하고. 상술에 넘어가면 안 되는 한 남자와 상술에 넘어가야만 하는 또 다른 남자의 묘한 운명 때문이기도 하고. 풋!
술에 흥청망청, 업무의 연장인 회식 자리에서 흐트러져 있는 척, 실은 정신줄 꼭 잡고 있는 남편이 항상 안쓰러웠다. 평소 꼿꼿하기 그지없는 사람인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마치 회식 자리에 내가 참석한 것처럼 그날 밤이 그려지니 말이다. 자리에서도 고개만 끄덕끄덕, 동조의 의미를 무한정 내뿜으며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먹는 너란 남자. 말이라도 이러쿵저러쿵하면 술에 덜 데일 텐데, 알코올은 몸속에 고스란히 쌓여 가고 몸은 점점 느슨해지는데 정신은 말짱하게 유지하려 저항하고.
어젯밤 희미한 의식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뭘 하나라도 마셔야 속을 진정시킬 수 있었던지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는 어제의 너를 나는 떠올린다.
빼빼로 데이였다는 걸 알아차리고, 며칠 지났다는 것도 알아차리고, 주섬주섬 보이는 대로 몇 개를 담아 손에 쥔다. 술에 취해 희미한 의식은 원조(?) 빼빼로에 손을 가게 하지 못했고, 비슷하게 생긴 것들을 쓸어 담았다. 겨우 겨우 집 앞에 도착하고, 현관 번호를 몇 번 잘못 누르고서 다시 정신을 가다듬는다. 다행히 집안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신발을 대충 벗어놓는다. 캄캄한 적막 속 곧장 주방으로 가서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식탁 위에 가지런히 세워둔다.
동이 틀 무렵 서서히 사위가 밝아졌다. 오늘도 까치집을 야무지게 짓고 방을 나오는 아이에게 모닝 뽀뽀 세례를 퍼붓기 전에 빨갛고 네모난 상자를 흔들어 보인다. 너를 사랑하는 아빠의 마음을 확대해서 설명해 주고, 그 사랑 어서 먹어야 하지만 아침밥을 무사히 먹고 난 후 먹자고 말했다. 아이는 어!라는 대답과 함께 “나 2개, 엄마 1개 아빠 1개”라며 아빠의 사랑을 굳이 개수로 나눈다.
’요 녀석아, 사실 이거 4개 다 내 거야! 알아?‘라는 말은 굳이 내뱉지 않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