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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네고 Nov 15. 2019

우리 말에 대한 고찰

만약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아직도 우리는 한자를 쓰면서 살고 있지 않을까? 한자로 의사소통을 하고 PC나 핸드폰의 한글 키보드 좌판도 없을 것이다.


1948년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이 공포된 이래 1970년부터 한글 전용정책이 강력히 추진되면서 초,중,고교 교과서가 한글전용으로 바뀌고 1988년 전후로 일간신문의 한글 사용 비율이 86% 대로 늘어난 결과 지금은 모든 매체를 막론하고 한문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실제로 70년대까지만 해도 신문이나 잡지에는 한자가 한글보다 더 많았다. 그래서 한글과 함께 한자를 배우는 건 필수였고..)


한문에서 벗어나 우리글을 사용하게 된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 말 중 많은 어휘들이 한자어에서 소리만 따서 한글 표기를 하다 보니 한자 어원을 모르면 개념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뿐만 아니라 특정분야에서 새로운 개념이 생겨 나거나 외래어에서 온 용어에 해당되는 기존에 없던 한글 용어를 만들 때 거의 대부분이 한자어로 만들기 때문에 학술 또는 전문적인 분야로 갈수록 한자어가 많은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새로운 용어를 만들 때 순우리말을 사용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추측건대 간략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크지 않을까 한다. 순우리말로 된 용어를 만들면 말이 불필요하게 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뢰성(信賴性 - 영어로 credibility 또는 reliability)'이란 용어를 순 우리말로 만든다고 가정해 보자. 신뢰성'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굳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성질'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그런 식이라면 책 몇 권을가지고 다니기 위해 가방이 아니라 카트를 끌고 다녀야 하지 않을까?


더욱이 기존에 있던 용어들이 이미 대부분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순우리말 단어와 혼용할 경우 전체적인 흐름이나 문맥에 일관성이 없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어쩌면 단순히 유식해 보이려고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한글은 과학적이고 우수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게 되었다. 즉, 한자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미완성의 글이라는 것이다.


학창 시절에 해외 원서를 번역한 책이나 전문 서적들을 보면 왜 그리 난해하고 딱딱한가 했는데 나중에 영어로 된 된 원서를 접하고 나서야 그 이유가 우리 말의 그런 특성에 기인한 점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보자:


흔히 쓰는 회계용어에 다음과 같은 용어들이 있다:


재무제표


손익계산서


장부가액


경상이익


회계에 익숙한 이들에겐 쉬운 용어들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겐 한 때 외국어나 다름 없었다. 아니 지금도 이 나는 이런 말들을 보고 있으면 바로 졸음이 몰려 온다.


그렇다면 이 말들이 유래한 영어 원어를 한 번 살펴보자:


financial statements - 재무제표 (財務諸表)


income statemeent - 손익계산서 (損益計算書)


book value - 장부가액 (帳簿價額)


ordinary income - 경상이익 (經常利益)


자 어떤가? 영어에 약간의 기본 지식만 있어도 감이 쉽게 오지 않는가? 심지어 용어에 대한 해설이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다음 물리학 용어들을 살펴보자:


동력핵반응로


양성결정


양극선


이 용어들의 본래 영어 단어는 다음과 같다:


power reactor - 동력핵반응로 (動力核反應爐)


positive crystal  - 양성결정 (兩性結晶)


positive ray - 양극선 (陽極線)


마지막으로 건설용어를 몇 가지 살펴보자:


열병합발전


공사시방서/사양서


계통설계설명서


이 말들의 영어 단어는:


combined heat & power  - 열병합발전 (熱倂合發電)


construction specification - 공사시방서 (工事示方書) /사양서(仕樣書)


system design description  - 계통설계설명서 (系統設計說明書)


이러한 예들을 보면 영어에서는 전혀 다른 분야라 하더라도 일상적인 단어들이 흔하게 쓰이며, 따라서 매번 생소한 단어를 새로 만들어낼 필요 없이 흔히 쓰는 단어들의 조합으로 학문적인 용어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일상적으로 쓰지 않는 생소한 단어들이 대부분인 의학 용어나 식물 이름 등은 예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와서 그 많은 용어들을 순우리말로 새로 만들어 쓸 수도 없고 다시 한자를 혼용해서 표기하는 것도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 된다. 그야말로 딜레마라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자라나는 세대들은 한자를 접하기가 점점 어려운 데다 더 취업이나 실생활에 필요한 지식들만을 섭렵하기 때문에 따로 한자를 공부하지 않으면 학문적 깊이가 얕아 진다는 문제도 있다.


우리말을 보다 완성된 언어로 발전시키기 위해 앞으로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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