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가난이 들지 않게, 시간의 ‘선’에서 나만의 행복 제스처로
너는 지금 행복해?
너가 좋아하는 일이야?
너는 지금 즐기고 있는 거야?
칸트는 고전적 행복의 조건을 3가지로 꼽았다.
일, 사랑, 꿈(소망)
공자는 지지자와 호지자의 차이를 이렇게 구분했다.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 보다 못하다.’
오늘 너가 말했다.
잘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 ─
등에 대해여 …
서글픈 건, 여기에 ‘좋아하는 일’ 혹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어쩌면 누구나 알지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 하고 싶은 거만 하고 사냐
어떻게 좋아하는 거만 하고 사냐
라는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젠장 …
저런 잔소리 따위, 개나 줘버리고 싶다. 너나 잘하세요.
라고 내뱉고 싶다.
때론 내가 아닌 누군가의 행복을 위한 선택과 결정을 해.
결국 스스로가 행복해지자고 하는 선택이었을 걸!?
그런데 누군가가 내 마음처럼
행복하지 않은 모습을 볼 때,
마음으로 그걸 느낄 때,
우린 이걸 ─
힘들다
지친다
라고 말해.
행복하지 않은 또 다른 하나는,
내가 선택한 거창한 희생이 뜻대로 되지 않아 비틀거릴 때야.
‘일’ 이 마음처럼 안 되는 거지.
여기서 최악의 순간은 둘 다 짬뽕으로 섞여 버리는 거지.
뒤엉켜져.
‘순서대로 하나씩 풀어보자. 해보자’ 라고는 되뇌는데,
엄두조차 나지 않는 그 순간.
미쳐버린다. 정말.
누군가에게 투영시켰던 행복도 엉망이 되어버렸고,
일 역시 소명을 잃어버리고,
이로서 꿈(소망)은 잊은 지 오래고,
나에게 꿈이란 게 있었던가 싶을 정도지.
Boy들만 야망이 있으랴.
오늘을 살고, 내일도 사는 누군가에게는,
그 끝을 다하는 날까지 ─
그 크기에 무엇이건 간에, 품 안에 무언가는 있게 마련이다.
그래야 오늘을 잘 살았다.
잘 살아냈다.
그리고 내일도 살자.
라고 하지.
밤마다 이 생각 저 생각하느라 뒤척이지 마.
잠은 푹 자야 하고,
먹을 땐 많이 먹기보다 많이 씹어야 해.
천천히.
오래 꼭꼭 씹어야 해.
불편한 생각 하나가 들어서면,
그 ‘하나’가 금세 열개, 백개, 천 개가 되어 너를 삼킬지도 몰라.
이 타이밍에,
자존심과 자존감까지 날을 세우게 되면 더욱 곤란해져.
높다. 낮다.
있다. 없다.
─ 등으로.
자존심은 낮 시간에 남들 앞에서 우월하게 나를 높이 세우는 기세로 드러나고,
자존감은 깊은 밤 오롯이 혼자일 때 깃든다.
기세가 하늘로 승천해 있으면 괜찮은데,
땅으로 곤두박질 처박고 있으면
감당 안될 텐데.
자존감은 잘못 쓰이면,
자꾸 스스로를 의심하게 하는 트리거가 된다.
위험하다.
그냥 그대로 흘려보내봐.
생각이 가 들어오는군.
이런 생각들이 있었지.
내가 불편했었지.
내가 짜증 났었지.
그대로 바라보고 그냥 내버려 둬.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것들,
너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도 생각해 줘.
‘의식의 훈련’ 이 낯설어 보이는
너에게
그래서 내가 말했어.
“사람들의 천 개의 표정은 알면서,
너의 표정 하나를
진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아직 너의 세상을 다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물질의 풍요보다
마음의 가난이 들지 않게
그렇게, 누군가 한 사람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모습 그대로도
충분히 괜찮아.
너가 가진 것을 아껴둬.
너의 장점,
너의 조용한 승리,
너의 맑음을.
스스로 아껴줬으면 해.
내가 아니더라도.
내가 없더라도.
그 누가 없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