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2. 산 마르띤 델 까미노 → 아스또르가
한국에 있는 친구 지에게 온 메시지에 답장을 하느라 나갈 채비가 늦어졌다. 집에서 굉장히 많은 식물을 키우며 살고 있는 나는 길에서 종종 그 초록이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몹시 걱정이 들었다. 무거운 내 마음을 덜어주기 위해 지는 잠시 내가 사는 집에 들러 살펴봐주었다.
나는 12년 전 까미노에서도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겨울이었다 보니 추위에 식물들이 멀쩡한지 마음이 쓰였다. 그때 부르고스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한국인 순례자 바실리오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하던 걱정을 여기서도 할 건 아니잖아?"
맞는 말이었다. 한국에서 하던 걱정거리를 이곳까지 끌고 올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친구에게 부탁까지 해서 한국에서 키우는 식물을 챙기려는 나는 참 한결같았다. 머무는 곳에 남아 그곳을 돌보던지 미련 없이 떠나 이곳을 즐기던지 둘 중에 하나만 할 것이지 나는 어떤 역할에도 자격미달이었다. 선택을 유예한 채 욕심을 부려대는 내가 스스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걷는 거리보다 짧은, 그리고 어렵지도 않은 길이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고생스럽게 걷고 있었다. 까미노를 걷기 시작한 지 삼 주가 넘어가던 시점이었다. 길 위에 오래 있다 보니 피로가 계속 누적되는 바람에 지쳐가는 듯했다.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엄마를 보며 나는 또다시 근심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맑은 날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해가 가려진 흐린 날이었으면 엄마가 이토록 힘들게 걷진 않았을 테니까.
우리는 다음날 배낭 하나를 다시 부치기로 했다. 다음날 오르기로 한 폰세바돈이 있는 길은 피레네 이후로 두 번째 만나는 해발 1400m의 고지이기도 했다. 그 외에 다른 해결책을 찾기란 어려웠다. 그리고 속히 걸음을 다그쳤다. 엄마에게는 편히 쉴 침대가 필요했다.
엄마를 다독이며 아스또르가의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그때는 한참 건물 외관 공사로 어수선했던 곳이었는데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에 사뭇 다르게 보였다. 알베르게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한국인 순례자 준이었다.
엄마와 나는 준을 바욘에서 처음 만났다. 파리에서 타고 온 테제베에서 내려 바욘에서 이제 생장 피드 포르로 넘어가는 기차를 갈아타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전광판에 우리가 타야 하는 기차의 플랫폼 번호가 뜨질 않는 거였다. 그때 같은 처지에 놓인 순례자가 내게 슬며시 다가와 기차를 어디서 타야 하는지 물어왔는데 그가 바로 준이었다. 그에게 적절한 답을 줄 수 없는 나는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엄마에게 말을 붙였다. 엄마는 나를 불러 세웠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생장 피드 포르로 가는 기차가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말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있는 내게 그는 이어 말했다. 역사 밖에 순례자들을 이송할 버스가 와 있으니 그걸 타면 된다고 말이다. 설명을 함께 들은 준도 우리처럼 버스에 오르며 까미노를 시작했다.
그 후로 준을 오가며 몇 차례 보긴 했지만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그래도 우리가 까미노에서 본 첫 순례자인데 소식이라도 알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 역시 가끔씩 그때 만난 서울에서 온 청년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꼬, 하며 궁금해했다. 그런 그를 아스또르가에서 다시 만난 엄마는 좋아하는 트로트 가수를 대하듯이 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절로 튀어나온 반가움이었다.
"엄마, 그 친구한테 라면 먹겠냐고 물어볼까?"
엄마와 나는 며칠째 배낭에 이고 다닌 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할 참이었다. 마침 라면이 세 개가 있었고 얼마 전 엘 부르고 라네로에서 산 캔김치가 하나 남아있는 터였다. 내 제안에 준은 야채샐러드에 과일까지 챙겨서 우리가 있는 공용 주방으로 찾아왔다. 조촐하긴 해도 한국인이라면 지나치기 어려운 음식인 라면 앞에 우리는 모여 있었다.
평소에도 마라톤을 즐겨하는 준은 그 덕분에 까미노에서도 남다른 속도로 걷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하루 이틀 코스는 더 멀리 갈 수 있는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대도시가 나오면 꼬박꼬박 2박을 하며 쉬었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운동을 일주일 내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정도 쉬어가는 것처럼 걷기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걷기에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아주 단순한 까닭을 바탕으로 준은 이곳을 건강히 누리고 있었다.
엄마가 먼저 잠에 든 이른 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알베르게 안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부산을 떨었다. 다음날 갈 마을인 폰세바돈에서 머물 알베르게를 아직 정하지 못한 탓이었다. 평소에는 큰 고민 없이 몇 가지 우선순위를 가지고 쉽게 정하던 것을 아직도 결정하지 못해 배낭을 부칠 주소도 쓰지 못하고 마냥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폰세바돈에서 같은 알베르게에 묵자고 약속한 프란체스카와 던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 골머리를 썩이던 차였다. 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그들을 찾아다니가 마침내 던을 만났다.
"던, 잠깐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그래, 말해보렴."
"내일 어느 알베르게를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 저런. 생각해 둔 곳이 있니?"
"네, 내일 저녁 식사를 잘 챙겨서 하고 싶은데 마침 이곳이 커뮤니티 디너에 비건 메뉴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프란체스카도 여길 괜찮아할지 모르겠어요. 보통 프란체스카는 기부제 알베르게를 가거든요."
"아, 며칠 전부터 너랑 함께 다니던 이탈리아 소녀를 말하는 거구나. 내일 네 생일이라고 같이 보내고 싶어 하던데 맞니?"
"맞아요. 그나저나 던은 어때요? 여기가 괜찮으세요?"
"그럼, 난 네가 선택한 곳이 어디든 괜찮단다. 나도 너랑 함께 네 생일을 보내고 싶으니까."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프란체스카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어딜 갔는지 통 보이질 않아요."
"… 음, 은영. 이건 내 생각이긴 하다만,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것을 최우선으로 두거라. 내일은 다른 날도 아니고 네 생일이잖니. 프란체스카도 네 선택을 존중해 줄 거야. 나도 마찬가지고. 네 생일인데 네가 머물고 싶은 데서 네가 편안한 식사를 하며 보내야 하지 않겠니?"
던의 말처럼 다음날은 다름 아닌 내 생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날을 오롯이 나를 위해 선택하지 못해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던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은 나 자신에게만 유난히 인색했던 마음을 돌아보게 했다. 매번 무언가를 선택할 때마다 혹시 이기적이게 나만 고려하고 있지 않나, 하는 무의미한 걱정을 덜어낼 수 있었다.
"프란체스카!"
어딜 갔는지 이제야 나타난 프란체스카를 드디어 만난 나는 한결 부드러워진 태도로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프란체스카는 내 걱정과 다르게 선뜻 내가 고른 알베르게를 가자고 했다.
"괜찮아! 그래봤자, 겨우 10유로밖에 안 되는 알베르게인걸! 어차피 거기에 있는 기부제 알베르게는 식사 제공을 하지 않으니까 무조건 밖에 나가서 사 먹어야 하잖아. 게다가 넌 비건이니까 그마저도 쉽지 않을 거고. 그렇다고 요리를 해 먹기에도 그 마을은 굉장히 작아서 슈퍼마켓도 변변치 않을 거야. 나도 거기가 좋아."
게다가 프란체스카는 내가 평소 내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알베르게 예약도 자처해서 하겠다고 나섰다. 여태 난 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거지? 무엇보다 내게 중요한 날에도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느라 나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나는 모두에게 최선이 될 수 있는 선택을 찾아 헤매며 나를 잃어버리는 걸까? 나는 침대에 누워서 엄마를 비롯해 이 길 위에서 만난 얼굴들을 떠올렸다. 이 사람들과 가까이하면 할수록 그런 욕심은 점점 커져갔다.
사실 나는 이 마음의 실체를 안다. 모두가 불평하지 않고 만족하는 하루가 되도록 시도 때도 없이 상대방을 살피고 싶은 욕망을. 그러다 내가 그런 여력이 없을 때가 되면 상대방의 불편한 심리를 눈치채더라도 모른 척하고 싶은 아이러니함을. 모른척한 것에 대해 끝까지 나를 지키는 이기로 무장하면 될 것을 집에 돌아와 그때마다 나서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책하는 어리석음을 말이다.
실은 이런 내 마음의 근원을 설명하는 아주 적절한 수식어를 알고 있다. 바로, K-장녀라는 단어이다. 이것은 나를 설명하는 단어 중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다. 그 까닭으로 단 한 번도 내 입에 올려본 적이 없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단 한순간도 내게서 떨어진 적이 없는 이름이기도 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부여돼 떨어지지 않는 라벨처럼 이것은 부정할수록 가차 없이 나를 항상 쫓아다니며 괴롭히곤 했다.
습관적으로 해오던 역할놀이는 까미노에서도 나를 지우는데 일조했다. 모두에게 최선이 되고 싶은 그 마음을 구석구석 파헤쳤다. 나는 그 '모두'에 '나'를 포함시키고 있었는지 확인을 해야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내가 없었다. 그럼,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나는 모두에 있지 않고 모두의 주변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로.
내가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생일을 하루 앞둔 밤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밤을 보내야 했다.
Day 22. JUL 1, 2024
San Martín del Camino → Astorga, 23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