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지 못하는 물건 4. 타인의 눈으로 본 나
지난해 이사를 하며 서랍에 정리했던 초상화 한 묶음을 다시 꺼냈다. 스물 한 번의 스케치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려준 내 얼굴들이다. 새로 장만한 냉장고 옆에 서서 그림을 하나 둘 자석으로 붙여본다. 냉장고 옆면을 가득 채운 그림 속의 나는 서로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 그림이 그려진 종이의 크기와 질감이 모두 다른 것처럼 나를 형상화한 선에서도 저마다 다른 힘이 느껴진다. 어떤 그림을 그릴지 고민하는 내 모습이 이토록 다양한 상(像)으로 존재한다니, 새롭게 느껴진다.
"이런 걸 해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문득 떠오른 것을 별 대수롭지 않게 실천에 옮기는 나를 두고 누군가는 돈이 되지 않는 일도 참 즐겁게 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물론 좋은 의미에서) 4년 전, 내가 재미있겠다며 떠올려 본 일은 바로 모르는 사람들과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고 생각을 나눠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스케치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 모임의 장소는 한강이었다. 그 무렵, 4월의 벚꽃이 지는 게 아쉬워 주제는 '봄'으로 정했다. 누가 오려나 싶은 마음과 동시에 묘한 기대감으로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스케치 모임을 홍보했다.
첫 번째 스케치 모임 <봄, 그리다>
날이 좋아서 야외 스케치 갑니다. 함께 하실 분 모여주세요.
참가비 없이 진행합니다. 봄기운 느끼며 그림 그리고 이야기 나눠봐요.
일시: 2017.04.23.SUN 15:30-17:00
장소: 반포 한강 공원
- 그림에 대해 1도 모르셔도 참여 가능합니다.
- 연필과 색연필을 가져갈 거예요. 그 외에 필요한 화구나 종이를 지참해주세요.
- 돗자리는 제 것만 챙겨갈 예정이니 참고해주세요.
- 본인이 드실 다과 거리를 가져오셔도 좋습니다. 취중 드로잉은 언제나 대환영!
드디어 스케치 모임 당일, 제법 그럴싸한 홍보 문구에 사람들이 낚였나 보다. 첫 모임에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던 것이다. 나는 미리 공지한 내용을 다시 설명했고, 우리는 봄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평소에 그림을 잘 그리지 않는다는 자기소개와는 다르게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봄을 끄집어내어 자신만의 언어로 그려나갔다.
그러나 처음 만난 사람들로 이뤄진 여느 모임처럼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비장의 카드를 꺼내야 할 차례였다. 나는 대학교 신입생 시절의 첫 드로잉 수업에서 그 힌트를 얻었다. 교수님은 처음 만난 신입생들이 둘러앉아 서로의 얼굴을 그려보자고 했다. 뭐 미대생들이니까 사람 그리는 일은 일도 아니었지만, 교수님은 대신 눈은 상대방 얼굴에 고정하고 그릴 것을 요구했다. 절대 종이를 보아서는 안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공간감을 기르게 하는 훈련이라고 했지만 그보다는 08학번 동기들이 서로 금세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엉망진창이 된 그림을 보고 하하호호하며 낯설었던 마음이 느슨해졌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그림으로 분위기를 전환하는 방법으로 딱이라고 생각했다. 종이를 보지 않고 그리는 그림인 만큼 망쳐도 그만이라 비전공자도 부담스럽지 않게 즐길 수도 있고 말이다. 봄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리 준비한 종이를 나눠주며 방법을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꾸만 종이를 보았다. 종이를 보지 말고 그리라는 말이 오히려 사람들에게는 더 버겁게 느껴졌나 보다. 결국엔 상대방 얼굴을 곁눈질로 보며 종이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쨌든 서로를 그리는데 모두가 동의하며 참여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더 중요했다. 대화도 오가며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적어도 하나 이상은 들고 돌아갈 수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특별히 날이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내가 시간이 되는 날에 그려보고 싶은 주제로 모임을 열면 누군가는 만나자고 한 장소로 나와 주었다. 그때마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달라져도 서로를 그리는 일은 이어갔다. 나는 모임을 진행하랴 새로 온 사람들을 챙기랴 정신이 없어 상대방 얼굴을 그려준 일이 거의 없었는데 감사하게도 내 얼굴을 참 많이도 그려주셨다. 이 모임의 주최자를 그리는 것이 가장 부담이 덜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스케치 모임을 한 회, 한 회 진행하며 내 모습이 그려진 초상화는 쌓여갔다.
갭이어 동안 장기 여행을 떠난다는 이유로 스물한 번째를 마지막으로 스케치 모임을 정리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땐 꼭 다시 열어보리라 마음먹었지만 야속하게도 팬데믹 시대가 도래하고 말았다. 집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마음으로만 두어야 했다.
냉장고 옆에 서서 그림을 그려준 사람들의 이름을 읊어 보았다. 윤아, 성은, 호수, 태경, 봉철, 하늘, 예지… 그리고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의 이름도 있었다. 그래도 이 선을 그었을 적 마음 만은 알 것만 같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서로 얼굴 그리기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자신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 이 만남을 추억할 수 있는 선물이 되길 바란다고 말이다. 새삼스레 오늘 난 그 선물의 의미를 알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