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감아 듣던 카세트테이프

버리지 못하는 물건 3. 자꾸만 듣고 싶던 목소리

by 은영

어렸을 적, 유난히 음악 방송을 좋아하던 내게 고모는 마이마이라는 것을 사줬다. 그 후로 유명 가수의 포스터가 붙어 있는 레코드샵 앞을 서성이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꼬깃꼬깃 모아둔 용돈으로 자그마한 사치를 부리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엊그제도, 그제도, 어제도 그랬다. 그리고 오늘이 되었다.

마침내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문에 달린 작은 종이 내는 소리에 괜한 긴장감이 돌아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팝송'이라는 배너가 붙은 곳 앞에 섰다. 사춘기 시절, 당대 열화와 같은 인기를 끈 팝송을 엄선해 발매하는 MAX, NOW라는 시리즈 앨범에 내 시선이 멈추었다.

계산대로 가져간 것은 2003년에 발매된 MAX 11집이었다. 아는 가수도 별로 없으면서 '18 OF TODAY'S BIGGEST HITS'라는 문구를 보고 당돌하게 골라 계산대로 가져갔다. 점원의 "안녕히 가세요."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투명 필름지를 뜯어내며 마이마이에 카세트테이프를 넣었다. 달칵하는 재생 버튼을 누르는 소리에 이어 스르륵하며 테이프가 감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A면의 첫 곡인 비욘세의 Crazy In Love가 흘러나왔다. 시대의 아이콘인 디바 비욘세의 노래로 포문을 열다니, 과연 오늘의 빅 히트를 친 곡을 모아둔 앨범다웠다.

그러나 앨범 패키지에 쓰인 수록곡 리스트를 다시 눈여겨보게 한 곡은 따로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A면의 세 번째 곡, 산타나의 The Game Of Love이었다. 라틴 락의 거장 카를로스 산타나가 만든 멜로디에 처음 들어본 가수인 싱어송 라이터 미쉘 브랜치가 피처링한 노래였다. 산타나의 멋진 기타 연주는 물론이거니와 앳되지만 강한 힘이 느껴지던 미쉘 브랜치의 목소리는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요즘은 음악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한 곡만 반복 재생하는 일은 별 일도 아니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그 노래만 따로 듣고 싶은데 쉽지가 않았다. 되감기 버튼을 길게 눌러서 어디까지 뒤로 돌아갔는지 들어보고 다시 돌리고 하는 일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원하는 노래의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또, 너무 오래 되감기 버튼을 누르고 있으면 이전 곡으로 넘어가기도 해서 다시 앞으로 돌리는 수고스러움이 따르기도 했다. 그 일을 여러 번 하면서 나중에는 얼마큼 길게 되감기 버튼을 누르면 되는지 감을 익힐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그게 아니면, 어쩌다가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올 때마다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공테이프에 녹음을 해서 그 노래만으로 채운 테이프를 만들기도 했다. 어쩜 노래가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지 신기할 노릇이었다.

21_14 kiss-1.png 황금빛 속 키스

Tell me just what you want me to be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길 바라는지 내게 말해줘

One kiss and boom you're the only one for me

한 번의 입맞춤으로 넌 내게 유일한 사람이 됐어

So please tell me why don't you come around no more

그러니 왜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지 내게 말해줘

Cause right now I'm crying outside the door of your candy store

왜냐면 난 지금 네 사탕 가게 밖에서 울고 있거든


산타나의 The Game of Love 중에서


겨우 초등학생 딱지를 뗀 나에게 사랑 노래의 가사가 와닿을 리가 없었다. 노래의 뮤직비디오도 그랬다. 처음부터 끝까지 키스 신 밖에 없는 4분 20초짜리 뮤직비디오였다. 하던 일을 내 팽개치고 상대방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키스하는 것에 심취한 사람들이 그저 놀라웠다. 커피를 따르던 잔이 넘쳐흐르는 것도, 달걀 프라이가 타는 줄도 모른 채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만을 바라보던 그 눈빛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나는 아직 할 수 없는 이 '어른들의 일'이 마냥 멀게만 느껴져 동경의 대상처럼 여기곤 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는 뮤직비디오 속 미쉘 브랜치는 정말이지 근사했다. 산타나와 기타를 치며 서로 눈을 마주치며 호흡을 맞추는 모습은 감동적이라는 말 그 이상의 표현이 필요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를 탔다. 곧이어 노래의 클라이 막스인 산타나의 기타 독주에서 불꽃이 터졌다. 그야말로 축제였다. 황홀하면서도 벅차오르는 이 기분. 단 하나의 노래만으로도 셀 수도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음악이란 것은 바로 이런 것이지 않을까?

그 앨범의 같은 면 여덟 번째 트랙으로 그녀의 2집 앨범 타이틀인 Are You Happy Now?을 들으며 역시 나는 이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부른 노래를 모두 찾아 듣기 시작했다. 비로소 나에게 취향이라는 것이 생긴 거다.


여전히 미쉘 브랜치의 행보를 쫓으며 늘 그녀의 노래를 가까이하고 있다. 여행을 갈 때는 Loud Music을,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Crazy Ride을, 월요병이 돋을 때는 Getaway을, 깊은 상실감에 빠질 때면 Desperately을, 산타나와 호흡을 다시 맞췄던 I'm Feeling You도 가끔씩 챙겨 듣는다. 순수하게 사람의 목소리를 사랑했을 때의 기억은 지금도 내게 어느 음악도 기꺼이 들으며 즐길 수 있는 양분이 되었다.

조심스레 고백하자면, 그 카세트테이프는 잃어버렸다. 분명 가지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는데 그게 아니어서 나도 당황스럽다. 아마 여덟 번의 이사를 하는 동안 잃어버린 것이 분명하다. 그 테이프가 없어도 스마트폰 음악 애플리케이션으로 간단히 검색만 해도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노래라는 것은 시간 속에 존재하면서도 흩어지지 않는다는 것 또한 놀랍다.

오늘은 청계천에 중고서점을 둘러보러 나갈까 한다. 나간 김에 근처 동묘에서 내가 기억 속에서 버리지 못한 MAX 11집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날에도 노래는 빠질 수 없다. 어떤 노래가 어울릴까? 그녀의 노래 Breathe 정도면 충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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